TV드라마와 장편영화는 유사한 장르일 뿐, 스토리텔링 방식은 무척 다르다. 장편영화는 대게 90분 내외의 물리적인 상영시간 안에 메인플롯과 서브플롯의 압축적인 결합으로 긴장감을 유지하고, 인상적인 결말로 서사를 마무리하면서 관객에게 즐거움을 준다. 물론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이렇게 단순화하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많다. 그런데 지난 백 년의 영화사를 통해서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영화의 문법은 어느 정도 입증된 구조와 형식이 있다. 예술성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므로 논외의 문제다.
반면 TV드라마는 대게 연속극 형태로 방영되기에 장편영화보다 물리적인 방영시간도 길고, 메인플롯과 서브플롯도 복잡하게 겹쳐져 있다. 영화 이론을 정리한 책은 무수히 많지만, TV드라마의 문법을 정리한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드라마 제작의 어려움을 안다면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사건을 극대화하는 소위 막장 드라마를 무턱대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 드라마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드라마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막장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대중과 상호작용하는 대중추수적인 서사장르
한 마디로 TV드라마는 영화적 방식으로 제작되는 오락프로그램이다. 영화처럼 이미 제작 완료된 작품이 대중에게 심사를 받는 작가주의적인 서사장르가 아니다. 영상과 서사의 전략이 분명한 영화에 비해 드라마는 방영시각, 방송채널, 방영횟수, 시청연령대, 시청률 등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드라마는 방영 시작부터 종영될 때까지 대중과 상호작용하는 대중추수적인 서사장르다. 그러므로 영화가 어쩌다 먹는 특별한 외식이라면 드라마는 매일 같이 먹는 평범한 가정식이다. 외식은 배달 짜장면도 맛있지만, 가정식은 뭘 해도 성가시고 평범하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어쩌다 먹는 외식은 돈값에 비례하지만 가정식은 정성 그 자체라는 걸. 매일 같이 먹는 가정식 백반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걸. 그 평범함이 대중추수적인 TV 드라마를 상투적이게 만들지만 동시에 강력한 파급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제작사에게 부와 배우에게 상을 주지만, 흥행에 성공한 드라마는 대중의 세계관을 바꾸고 사회의 트렌드를 교체한다. 특히 대중문화가 TV에 크게 좌우되는 한국사회에서 드라마는 그 어떤 서사장르보다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강력하다. 1980년대 보급된 컬러 TV는 199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를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 바꾸어 놓았다. 최근 들어 공론화되는 책의 죽음과 문학의 쇠퇴는 이미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대중문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진지한 대중’
1990년대는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처음으로 ‘진지한 대중’이 등장한 시기다. 소위 ‘마니아’라 부르는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대중문화를 단순한 유희적 경험으로 치부하지 않고 진지한 지적 취향으로 인식하고 때론 과시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질투>가 당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김진명, 이우혁, 공지영의 소설들보다 더 강력한 대중문화의 충격과 유행을 만든 것은 컬러 TV가 만들어낸 영상문화가 대중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결과다.
대중은 한 권의 책보다 한 편의 드라마가 보여주는 세계관을 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한다. 더구나 그 드라마가 사회역사적 가치와 동시대적 감각을 대변한다면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인정받길 원하는 지적 취향으로 쉽게 포장된다.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이 한국 대중음악 시장을 송두리째 바꾼 이유도 바로 대중문화를 영상문화로, 자기정체성의 기호(sign)로 간주한 진지한 대중의 등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문자문화의 사유보다 영상문화의 직관이 대중문화의 주류를 이루면서 대중은 심각함보다 진지함을 선호하게 되었다. 심각함은 타인과 교감 없이 자기 문제에 몰두한 심리라면 진지함은 타인과 함께 소통하며 자기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공유하고 싶은 심리라 할 수 있다. 같은 책을 함께 모여서 읽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만 같은 영상물을 함께 모여서 보는 사람들은 흔하게 볼 수 있다. 극장이나 거실은 직관적인 영상문화를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책을 읽은 후 토론하려면 멍석이 필요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토론하려면 길거리라도 상관이 없다. 영상문화의 직관성이 심각한 대중보다 진지한 대중을 만든 것이다.
대중의 문화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향유할 유일한 문화
대중문화는 더 이상 대중에게 심각한 숙제가 아니다. 대중은 단지 대중문화 안에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지지받기를 원할 뿐이다. 이제 대중문화는 소양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가 되었다. 대중은 대중문화를 소비할 때 더 이상 계몽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왜 내가 물건을 구매하면서 판매자의 설교를 들어야 하나?”
싸구려 같고, 왠지 저렴해 보이는 대중문화이지만 영상문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화는 인류 역사상 처음 등장한 사건이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평범한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화란 존재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지배체제를 유지하지 위해 권력자들이 조직하고 관리한 민속문화가 전부였다. 민속문화를 대신하여 대중문화가 등장하고, 대중문화가 귀족문화까지 섭렵한 사건이 지난 20세기 인류가 경험한 문화 대혁명인 것이다. 대중문화가 문화의 가장 이상적인 정답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대중의 문화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향유할 유일한 문화의 대안이다.
때론 경박하고 즉흥적이지만 스스로 향유하는 문화를 진지하게 대하는 대중과 대중문화의 출현을 이토록 거창하게 설명하고 열거한 것은 고작 TV드라마 한편에 대한 비평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TV드라마 한편 때문에 대중과 대중문화를 비평하고 싶게 만든 이유를 떠들고 싶어서다. 영화와 드라마, 문자문화와 영상문화, 대중과 대중문화에 대한 단상을 강박증처럼 이렇게 몰아 부친 것은 바로 JTBC의 드라마 <송곳> 때문이다.
복잡하고 비루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하층노동자의 생존권 싸움은 노조를 통해서 풀 수 있으며, 노조 역시 노동자 조직 이전에 인간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드라마 <송곳>의 메인플롯이자 주제다. 주인공 이수인 과장과 구고신 소장의 대형마트 노조 건설을 위한 고군분투를 다룬 드라마 <송곳>은 최규석 작가의 웹툰을 바탕으로 TV드라마로 각색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평균시청률 1.5%에 그치는 저조한 성적에도 일부 진보매체와 교양프로그램, 학계와 비평계에서 드라마 <송곳>과 웹툰 <송곳>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 당위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지지 혹은 응원 일색이다. 한마디로 “수고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에 해당하는 수사가 대부분이다. 사회적 정의(正義)를 다루었다고 평가까지 올바름으로 치장되는 것은 사회적 정의를 오히려 공공의 무지(無知)로 만드는 일이다. 도덕적 올바름과 미학적 즐거움은 서로 모순관계가 아니듯 반대로 서로 유의관계 역시 아니다. 올바른 목소리를 낸다고 모두가 즐거워한다면 이 세상에 정치나 철학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송곳>에 있지만 대중문화에 없는 것, 대중문화에 있지만 <송곳>에 없는 것
드라마 <송곳>의 문제점은 단지 낮은 시청률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시청률이 나오게 된 이유를 통해서 우리는 드라마 <송곳>에는 있지만 대중문화에 없는 것, 반대로 대중문화에는 있지만 드라마 <송곳>에는 없는 게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TV드라마로서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하기보다 순진한 자세로 기획된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주말 저녁 9시 40분은 대중의 시청권이 주로 전업주부와 아이들에게 있어서 노동자의 생존권 문제는 관심 대상이 되기 어려운 시간대다. <송곳>의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는 기업근로자와 소외계층 노동자가 주말 저녁까지 리얼리즘으로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고 싶을지도 의문이다. 차라리 뉴스보도로 최근에 관심을 끌고 있는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룸>이 끝난 후인 평일 밤 9시 40분에 방영되었으면 <뉴스룸> 3부 정도의 인기를 끌지 않았을까 싶다. 손석희 앵커의 뉴스 보도 리얼리즘이 연이어 <송곳>의 드라마 리얼리즘으로 이어진다면 대중은 극적인 체험과 공감을 하였을 것이다.
매체로서 플랫폼의 변화는 전달방식과 내용 형식의 변화 모두 해당
한편 웹툰을 원작으로 할지라도 원작의 설정을 답습하기보다 동시대성을 갖춘 내용 변화에 보다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원작을 단지 다른 매체로 변용하는 콘텐츠 제작 방식이 아니다. 매체로서 플랫폼의 변화는 전달방식과 내용 형식의 변화 모두 해당한다. 단지 스토리텔링의 매체 변환만을 뜻하지 않는다. 웹툰 <송곳>이 2003년 6월을 시대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당시 한국 까르푸 노조의 파업사태가 있던 해였기 때문이다. 물론 리얼리즘으로서 핍진성은 중요한 문제이고, 나아가 IMF 이후 만연한 외국계 기업의 만행과 실태를 고발하는 것 역시 의미가 있다. 그런데 12년이 지난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드라마 <송곳>보다 더 디테일하게 절망적이고 섣부른 희망마저 사치스럽다.
민간기업의 정규직 노조 가입률이 겨우 10%를 유지하기 힘들고, 비정규직 노조 가입률은 2%에도 미치지 못하며, 노동자들끼리 연대와 신뢰마저 붕괴되어 집단적 조합주의 대신 개인적 스펙 쌓기로 각자도생하듯 생존투쟁을 해야만 하는, 2015년을 사는 우리들 눈에 드라마 <송곳>의 2003년 풍경은 짐짓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웹툰 <송곳>의 시대 배경과 상황 설정을 드라마 <송곳>은, 2015년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에 맞게 과감하게 바꾸었다면 어땠을까. 대형마트 노조와 동네마트 주인과의 갈등과 연대가 차라리 구사대에게 두들겨 맞는 노동자의 모습보다 더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매 회가 파업투쟁의 과정을 매뉴얼처럼 구성한 서브플롯
드라마 <송곳>의 이러한 문제점들이 기대에 못 미친 아쉬움 정도라면, 12부가 각각 방영될 때 매 회가 파업투쟁의 과정을 매뉴얼처럼 구성한 서브플롯은 작가와 연출자 모두가 흥행 실패에 책임을 피하기 힘든 뼈아픈 이유가 되고 말았다. 구고신 소장의 개인적 아픔에 기댄 신파스러움과 이수인 과장의 어색한 영웅주의 행각이 드라마의 횡축을 이루며 등장인물의 성격과 내면은 지나치게 설명적으로 드러났다. 회사 측 대리인인 정 부장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파업 스토리가 드라마의 종축을 이루며 매 회 사건은 파업매뉴얼대로 일어났고, 노조의 결성과 파업을 위한 매 회 미션만이 극적인 긴장과 서사의 약한 고리를 묶는 접착제 역할을 수행했다.
TV드라마는 계몽의 수사학이 아니다. 노조 결성방식과 파업 투쟁방식은 노조와 파업의 하위 개념이자 디테일의 문제다. 시청자는 드라마를 보면서 노동법을 공부하기보다 노동법이 왜 필요한지를 직관적으로 공감하고 싶을지 모른다. 차라리 애니메이션 기법을 이용하여 그런 구체적 개념이나 디테일은 간결하고 쉽게 전달하고 드라마는 인간과 현실의 문제에 더 천착하는 것이 시청자의 대중적 욕망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드라마 <송곳>은 노조와 인간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그 전에 방송 드라마로서 장르적 성찰이 미흡하여서 대중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송곳>의 메시지 중 하나였던 “인간은 서 있는 곳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라는 구고신 소장의 멋진 멘트처럼 시청자의 시선에서 드라마를 좀 더 냉철히 봤으면 어땠을까.
자신의 권리와 관련된 조직이나 단체에 가입한 경험이 거의 없는 우리의 모습
정확한 조사는 해봐야 하겠지만 드라마 <송곳>을 본 시청자는 아마도 대부분 웹툰 <송곳>을 이미 본 대중일 것이다. 웹툰 <송곳>을 인상 깊게 본 진지한 대중이 드라마 <송곳>에서 더 많은 공감과 재미를 느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웹툰 <송곳>을 보지 않은 대중이 드라마 <송곳>을 보고 공감과 재미를 느꼈다면 더 좋은 일이다. <송곳>의 메시지에 교감해서 좋은 일이고 드라마 <송곳>의 완성도가 인정받는 일이기에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바람은 아직까진 묘연하다. 웹툰 <송곳>이 웹툰 <미생>만큼의 관심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드라마 <송곳>이 드라마 <미생>만큼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그리고 그 이유를 <송곳>과 대중 모두에게 따져보고 싶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권리와 관련된 조직이나 단체에 가입한 경험이 거의 없다. 노조는 고사하고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정당조차 가입하기를 꺼려하거나 어색해한다. 그런데 운전 중에 누군가 내 앞으로 차선에 끼어들면, 주문이 밀린 식당에서 나보다 늦게 주문한 사람의 음식이 먼저 나오면, 똑같은 제품인데 아는 사람이 나보다 더 싸게 구입한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왜 쉽게 분노할까, 왜 자신의 권리가 크게 침해당했다고 생각할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체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나를 자극하는 직접적인 사건은 분명하고 뚜렷하다. 나를 괴롭히는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는 맞설 수 있지만 회사와 정부처럼 실체 없이 권위로 유지되는 큰 조직에게는 맞설 용기조차 쉽지 않다. 우리는 작고 직접적인 것에는 쉽게 분노하고 덤비지만, 크고 간접적인 것에는 금세 단념하고 회피한다. 권력은 어렵고 욕망은 쉽기 때문일까? 나의 이익은 오롯이 내 것이지만, 모두의 이익은 공평히 나눠야 하기 때문일까?
해고하면 안 될 사람, 해고당하면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현실적 리얼리즘
공교롭게도 이 질문에 답을 찾는 데 힌트가 될 세 편의 드라마가 있다. 2013년 KBS2에서 방영된 <직장의 신>의 슈퍼 계약직, 미스 김(김혜수 분)은 실력을 키우라고 말하고, 2014년 tvN에서 방영된 <미생>의 인턴 계약직, 장그래(임시완 분)는 열정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2015년 JTBC에서 방영된 <송곳>에는 그런 말을 하는 인물이 없다. 대신 함께 하라고, 혼자 가지 말고 같이 가자고 보여준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TV드라마 중에 노동자 문제를 개인이나 동료 차원이 아닌 기업과 사회 체제의 문제로 보여준 드라마는 <송곳>이 유일하다. <직장의 신>은 해고해도 상관없을 사람을 등장시켜 풍자적 판타지를 보여주었고, <미생>은 해고해도 될 만한 사람을 등장시켜 해고당해도 포기하지 않는 사회성장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대신 <송곳>은 해고하면 안 될 사람, 해고당하면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현실적 리얼리즘을 보여주었다. 이 세 편의 드라마가 제시하는 힌트는 각각 의미가 있다. 다만 이런 문제를 한 개인에게 떠넘기는 사회를 더 많이 사랑하거나 믿기는 힘들 것이다. 최소한 <송곳>은 그 문제를 같이 풀어보자고 했다. 물론 이 사실이 드라마 <송곳>의 미흡함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드라마 안에서 구고신 소장이 언급한 우리 안, 누군가, 송곳이 출현할 것을, 진심으로, 간절히 기대는 하고 싶다.
글 김우필(문화평론가, 명지대 객원교수, <생각의지평>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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