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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도서관보다 놀이하는 도서관을 바라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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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지평 2021. 8. 1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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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도서관보다 놀이하는 도서관을 바라는 이유

: 작은도서관 사업과 공동체 문화에 대하여

 

만약 인류 최고의 발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도시(都市)’라고 답할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에서 단순한 군집 수준을 떠나 정치, 경제, 문화를 조직한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도시는 인류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황무지를 혼자서 혹은 가족 단위 수준으로 방랑하며 사는 것과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도시에서 사는 것 중 생존 가능성은 당연 도시가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비록 도시의 권력자들이 착취와 억압을 가한다 해도, 야만의 상태인 숲과 먹을거리를 찾기 힘든 황무지와 무법천지의 낯선 길에서,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았다. 도시는 필요악의 공간이다. 때론 도시의 희열이 죽음의 환멸을 만들어내지만 인간은, 특히 현대의 인간은 도시를 결코 떠나서 살 수 없다. 귀농이니 전원이니 하는 삶조차 도시는, 잠시 혹은 오랫동안 비껴가고 싶은 곳이지 무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도시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당연하다. 도시는 인간이 일상을 누리는 실존적 공간이며, 생존투쟁과 이해관계가 실제로 벌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독서 행위는 교육이자 문화여야 한다.”

대중매체를 전혀 접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그의 인식 안에서 세계는 지구촌이니, 국가니 하는 거창한 공간이 아니라, 출퇴근길에 보게 되는 사람들과 차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들, 그리고 휴일이면 골목길에서 인사를 건네는 동네 주민들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는 공동체의 실존적 단위로서, 세계 그 자체다. 국가는 공동체의 추상적 단위에 불과하다. 공동체운동을 좌파적인 사회운동처럼 매도하는 사람조차 도시를 원하고 부정하지 못한다. 도시의 문제는 더 이상 이념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이제는 공동체 문제를 지식인은 물론이고 정치인, 기업인, 심지어 아파트 부녀회까지 중요한 이슈로 다루고 있다. 공동체 문제는 일상을 어떻게 향유할 것인지 결정하는 실존적인 문제다. 그래서 공동체 문제는 주민자치라는 자율성을 바탕으로 존립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율성이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 공적 공간으로 도서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서관은 단지 책을 보는 곳이 아니다. 책은 그 자체가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적 매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고 소통하게 만드는 정서적 매체이다. 도서관에 사람이 가는 이유가 단지 책을 대출받거나 읽기 위해서라면, 그런 도서관을 대신할 수 있는 가상공간의 전자도서관은 무수하고, 지금도 계속 무섭게 확장 중이다. 도서관은 책을 매개로 어떤 정서적 아우라를 풍기는 사적 욕망의 공적 공유가 일어나는 곳이다. 주민자치센터나 초등학교 건물에는 어떤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하지만 도서관은 결코, 강제적인 방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도서관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꺼이 공적 공간을 나만의 책상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만드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공적 공간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이런 일을 즐기기까지 한다. 이럴 수 있는 공적 공간이 우리가 아는 공적 공간 중에 또 있을까? 더구나 걸어서 30분 이내면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금상첨화다. 2009년부터 본격화된 작은도서관 사업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은도서관은 공공기능을 수행하는 전국의 기관 중에서 주민자치센터(2014년 기준 2765)보다 많고, 초등학교(2013년 기준 5913)보다 조금 적은 5660(2015년 기준)이 있다. 그러나 작은도서관은 주민자치센터나 초등학교처럼 이미 시민의 일상을 지원하는 제도적 공간으로 설치되었으나 시민의 일상으로 향유되기엔 주민자치센터의 문화교실보다 인지도가 낮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2014년 전국에 설치된 작은도서관의 연간 총 이용자 수는 32,642,410명이며, 작은도서관 1관당 연간 이용자 수는 평균 6,237명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루 평균 약 17명에 해당하는 숫자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2014년 전국에 설치된 주민자치센터의 문화교실 하루 이용자 수는 평균 114명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를 연간 평균 이용자 수로 계산하면 41,610명이 주민자치센터의 문화교실을 이용한 셈이다.

 

인천 <여행인문학> 도서관

 

17명 대 114명이라는 하루 평균 이용자 수를 한국인의 저조한 독서량 정도로 치부하기에 작은도서관 사업은, 공공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너무나 비대하고, 공동체 문화를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조금은 초라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현상을 독서만능주의식으로 비판하거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 역시 촌스럽다. 책을 읽어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는 식의 의제는 도서관과 독서를 효용적 가치의 굴레에 가두고 만다. 책을 꼭 무슨 필요 때문에, 쓸모 있어서 읽는다는 생각은 독서를 교육적 방법론으로 제한해서 보는 반()문화적 태도다. 교육으로서 독서를 무시할 수 없지만, 독서는 그 자체가 주는 쾌감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문화. 지금 우리의 도서관 정책과 독서 실태가 미흡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책을 너무 중시하기 때문에 생겨난 병폐다. 책은 공부의 수단이며, 공부는 교육의 핵심이라는 생각. 그러니 책, 공부, 교육의 삼위일체가 강림한 나라에서 시민들은 골치 아픈 도서관보다 주민자치센터 문화교실서 춤과 노래에 더 열중한다. 공부를 위한 독서가 독서의 목적이라는 생각을 극복할 때, 독서는 문화가 될 수 있고, 문화를 향유하는 다양한 공부가 가능해진다. 책은 무엇을 위한 매체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작은도서관 진흥법 제5조와 제6조의 간극

사실 작은도서관 사업은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공동체 사업이 아니다. 이미 서구 유럽에서는 20세기 초부터 공공도서관(Public Library)과 구별하여 지역 단위의 마을도서관(Community Library) 사업을 시작했고, 최근에 와서는 스튜디오나 스토어 개념으로까지 변화하고 있는 추세다. 작은도서관 하나가 지역 주민의 삶을 얼마나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수행하는지는 국내외적으로 무수히 많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작은도서관 사업의 필요와 효과는 이미 충분히 입증되어 반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국내의 작은도서관 사업 자체가 아니라 운영방안이다.

 

영국 <화이트채플> 도서관

 

정부 역시 작은도서관 사업에 대한 최근의 실태조사에서 작은도서관을 조성하기보다 바람직하게 운영하는 방향으로 정부가 지원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의 생각에 화답하듯 도서관 실무자들과 전문가들 역시 구체적인 해법을 작은도서관 활성화와 바람직한 운영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실무자들과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작은도서관 사업이 현재 처해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임에는 분명하지만, 작은도서관 사업이 도시의 공동체를 건강하고 공고하게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엽적이고 현상적이다. 그래서 다시 질문의 화살이 작은도서관 사업 자체의 콘셉트를 향해야 한다. 작은도서관 사업의 본래 목표가 무엇이었으며, 정부는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의지가 과연 있는지, 그리고 시민은 어떻게 호응하고 참여할 수 있는지. 먼저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작은도서관 사업 진흥법(법률 제11316, 2012년 제정) 5조와 제6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법인·단체 또는 개인이 설치·운영하고자 하거나 운영 중인 작은도서관에 대하여 예산의 범위에서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

 

6조 작은도서관은 주민의 참여와 자치를 기반으로 지역사회의 생활문화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운영하여야 한다.”

 

5조는 작은도서관의 설치 및 운영에 대한 조항이고, 6조는 작은도서관의 운영방향에 대한 조항이다. 나란히 붙어있는 이 두 조항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은 각 조항의 주어와 서술어다. 5조의 주어는 국가 및 지자체”, 서술어는 “~지원을 할 수 있다.”, 6조의 주어는 작은도서관은”, 서술어는 “~운영하여야 한다.” 국가 및 지자체와 같은 공적 기구는 예산을 지원할 수 있다는 식의 선택조항이 제5조라면, 작은도서관은 주민참여와 지역자치를 위해 운영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제6조의 맥락이다. 현실적으로는 모든 작은도서관이 재정지원을 공적 기구로부터 받고 있다. 공립은 전액 세금 지원을 받고 있으며, 사립은 운영비의 일부를 지원 받는다. 문제는 제5조와 제6조의 간극이 발생했을 때, 국가와 지자체는 언제든지 운영 지원을 중단하거나 민간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관리를 포기 혹은 태만할 수 있다.

작은도서관 같은 공적이며 제도적인 공간이 유지, 발전되려면 공공성(公共性)을 지향해야 한다. 공공성은 도덕으로 확보되는 게 아니라 자원으로 실현된다. 운영주체에게 요구되는 공공성은 의무이면서 관리주체에게 요구되는 책임성은 선택이라면 과연 공공성의 실현과 지속이 가능할까? 유사한 경우로 공립유치원(혹은 어린이집)과 사립유치원의 공공성은 정부와 지자체라는 관리주체의 책임성을 담보로 유지되고 있다. 아무리 사립유치원이라도 공적 기구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기에 유치원 시설은 물론이고 교육방식까지 공적 기구가 감시하고 간섭할 수 있다.

공공성은 단지 공적 기구의 참여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공적 기구가 적극적으로, 의무적으로 지원할 때 가능하다. 그런 식의 지원 없이 관리감독만 하는 공적 기구의 모습은 공공성이 아닌 관공성(官公性)에 불과하다. 대통령 소속 기구인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에서 밝힌, 중앙정부의 2015년 작은도서관 사업 지원 예산이 20억 원이다. 2015 10월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작은도서관은 5660곳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 교과서 개발 예산은 17억 원이다. 국사 교과서 1권 개발하는 비용과 5660곳 도서관 지원 예산이 고작 3억 원 차이다.

 

작은도서관 증가와 아파트 유행의 상관성

작은도서관 사업은 정부에 의해 제도적으로 시작된 문화 사업이지만 동시에 주택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본격화되어 지금처럼 크게 확장된 사업이다. 1994 주택건설기준등에관한규정 법에 따라 500세대 이상 공동주택에서 문고(文庫) 설치를 의무화하면서 새마을문고의 형태로 작은도서관이 제도적 차원에서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9년 같은 법이 300세대 이상 공동주택에서 경로당, 어린이놀이터, 어린이집, 주민운동시설 등과 함께 작은도서관 설치를 의무화하는 쪽으로 개정되었다.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전국적으로 수천 개의 작은도서관이 본격적으로 설립되었다. 작은도서관의 양적 성장은 공교롭게도 국내의 공동주택, 즉 아파트 건설 유행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다. 물론 2012년 제정된 작은도서관 사업 진흥법이 작은도서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실질적인 운영지원 방향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주택건설기준등에관한규정이 작은도서관 사업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조성시킨 결정적인 법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대유행이 되어버린 아파트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 작은도서관을 확대조성시켰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에서 주민들을 위한 공공시설로 등장한 작은도서관은 분명 교육문화 공간을 목적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아파트에서 운영하는 작은도서관은 아파트 거주 학생들의 공동독서실이나 어린이들의 독서교육용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전국의 작은도서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자습하는 수험생과 아동도서로 가득 찬 책꽂이 모습이다.

도서관에서 시험 공부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도서관 책꽂이에 아동도서 많은 게 유치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용도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작은도서관 풍경이라는 게 문제다. 시험공부용, 유아교육용 도서관이라면 공공도서관이나 사립독서실, 유치원과 학교 도서관이 그 역할을 주로 담당하는 게 옳다. 작은도서관이 특정한 연령층과 목적으로만 활용된다면 굳이 공적 공간으로 공적 기구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 차라리 공공도서관에 시설 확충이나 도서구입을 지원하는 게 수험생이나 어린이들에게 더 나을 것이다. 이처럼 사립 작은도서관 중에서 약 30%를 차지하는 아파트 작은도서관(2014년 기준 1173)의 모습이 작은도서관의 현주소를 대신 보여준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작은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 아니다. 아파트 품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적 장식이거나 주민들 아이가 무료로 놀 수 있는 쉼터 공간에 더 가깝다. 좋은 아파트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 속물적인 공간으로서 작은도서관을 잉태했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은평구 작은도서관 <다섯콩도서관>

 

도시재생을 위한 세포, ‘놀이하는도서관’

현재 작은도서관 사업은 독서, 교육, 공부라는 타성화된 시민의 책읽기 의식과 국민을 여전히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정부의 관료주의와 도서관을 부동산 전리품 정도로 욕망하는 대중의 속물주의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양적 팽창이 질적 향상으로 갈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이쯤에서 버려야 한다. 아도르노(T. W. Adorno)는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에 대한 수요는 반드시 타율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작은도서관 사업이 길을 잃게 된 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지 않고 낡은 표지판만을 맹목적으로 따라갔기 때문이다. 

프랑스 68혁명을 문화혁명으로 이끌었던 유명한 지도자이자 정치철학자인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는 민주주의란, 자율성을 지향하는 정체(政體)이며, 자율성이란 묻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허용되고 금지되는지 미리 결정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은 타자가 부여한 규칙을 따르는 타율적 존재다. 그래서 타율성에 빠진 존재는 제도와 규칙을 내면화하지 그것들을 바꾸지 못한다. 대신 자율성을 추구하는 존재는 제도와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독서가 교육의 전부였던 시대는 인터넷과 모바일이 대중화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지금은 책 한 권의 지식보다 네이버나 구글의 검색 결과가 더 다양하고 정확한 시대다. 독서는 이제 교육에서 문화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교육은 지식 전달자의 권위에 따르는 타율성을 본질로 한다. 반면 문화는 지식 생산자의 참여로 빛나는 자율성을 본질로 한다. 이제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읽는 곳, 아니 문화를 만들어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작은도서관이 도서관 콘셉트 변화에 공공도서관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리적 장소에 책을 보관하고, 그곳에서 책을 읽으려면 공공도서관이나 대형서점이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기에 충분하다. 작은도서관까지 그런 기능을 흉내 낼 필요는 없다. 작은도서관은 단지 물리적 크기가 작은 도서관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가깝고 친밀한 공동체 공간으로 그 기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책이란 매체를 통해서 소통과 자치를 실현하는 문화 공간으로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최근 들어 도시재생이 사회적 화두다. 산업화시기를 거치면서 도시의 양적, 물리적 성장만을 추구했던 우리 사회도, 이제는 인구감소와 경제성장 둔화, 환경오염과 문화적 욕구 향상에 따라 새로운 공간을 욕망하고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처럼 부작용도 발생하지만 도시재생의 큰 목적과 흐름은 거부하기 어렵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도시재생이 주로 재개발, 재건축처럼 하드웨어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의 도시재생은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일 뿐이며, 부동산 개발 욕망으로 변질될 가능성만 높인다.

다행히도 서울시를 필두로 시작하여, 전국 대도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는 마을공동체 사업이, 도시재생의 소프트웨어적 차원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대안이 되고 있다. 그런데 지역공동체의 교육과 문화를 담당하면서 마을공동체 사업과 함께 지역자치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인프라가 바로 작은도서관 사업이다. 어쩌면 작은도서관과 마을공동체 사업은 서로 연계하거나 통합하여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제 작은도서관은 책을 보관하는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기억을 보관하는 문화적 장소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작은도서관이 도시재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공적 인프라로서 콘셉트를 바꿀 때가 온 것이다. 작은도서관은 조용히 침묵한 채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서로 공동체의 문제를 질문하고 토론하여 함께 답을 찾아가는 새로운 장소가 될 만하다. 이쯤 되면 작은도서관에서 학생들만 공부하지 말고 주민들 모두가 모여 놀아보는 건 어떨까. 이참에 이름도 작은도서관이 아닌 놀이하는도서관으로 아예 바꿔보는 건 또 어떨까.

 

글 김우필(문화평론가, 명지대 객원교수, <생각의지평>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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