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은 고통을 회피할수록 강화된다. 고통 없는 삶은 없다. 고통은 호흡처럼 우리가 살아 있다는 흔적이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는 인간을 크고 작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크고 작은 중독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한 중독을 조장하고 매개하는 주체는 십중팔구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자 한다. 대중의 중독 없이는 부와 권력은 계속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중에겐 이익을 얻으려면 죽을 때까지 경쟁해야 한다고 세계화 체제의 정당성을 강요하면서 정작, 거대기업과 기업의 이익에 복무하는 정부는 경쟁 없이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메커니즘을 고안하고 있다. 중독은 그러한 메커니즘의 핵심 동인이다.
드라마 <돕식 : 약물의 늪>은 양귀비에서 추출한 오피오이드 계열의 마약성 진통제 "옥시코틴"을 개발하고 판매한 거대 제약회사 "퍼듀파머"의 탐욕과 재벌 기업의 탐욕을 거들며 함께 이익을 보려한 정부의 부패를 폭로한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로서, 거대 재벌 제약회사의 탐욕과 정부 관료들의 부패를 조사하고 폭로하는 과정에서 중독의 메커니즘이 개인이 아닌 사회체제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중독은 개인의 잘못된 습관 때문이라는 윤리적 문제의식 제기보다 먼저 개인의 습관을 누가, 어떻게 주입했냐는 사회적 문제의식 제기가 선행되어야 할 본질적 물음임을 드라마 <돕식>은 강조하고 있다.
고통은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시작된다. 조금 더 자고 싶은 욕구를 거부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할 때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고통과 싸운다. 출근길 버스와 지하철에서 온몸으로 군중 압박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회사와 학교에서 피곤과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 우리 삶은 그렇게 고통과 대면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고통을 좀 더 완화할 방법을 사회적으로 성찰하고 제도적으로 고안하지 않고, 그 방법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운동, 식이요법, 취미활동 등으로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건 이미 그러한 행위조차 노동의 연장이고 계급적 지위의 결과임을 은폐하는 신자유주의 서사일 뿐이다. 운동할 시간이, 비싼 유기농 식재료를 요리할 시간이, 친절하고 여유로운 사람들과 교제할 시간조차 없는 많은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고통은 그저 견뎌야 하는 일상이다. 그러니 값싼 진통제로 고통을 달랠 수 있다면 그건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리고 그 대가는 중독이고, 이들이 지불한 약값은 다시 거대 재벌 기업의 수익이 된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누가 끊어야 할까. 아니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드라마 <돕식>에선 두 명의 연방 검사가 온갖 방해와 유혹을 극복하고 끝까지 사건을 조사하여 퍼듀파머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약의 위험성을 세상에 알린다. 이 두 검사의 정의로움이 없었다면 "옥시코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부각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이 심각한 문제 해결을 검사의 정의로움에 맡겨야 한다는 현실에 무기력함을 느낀다. 그런데 그러한 검사라도 있는 미국이 부럽기도 하다.
글 김우필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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