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1 : 나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 VS 나는 타인 때문에 손해를 보기 싫다
상황2 : 나는 타인의 이익을 해치고 싶지 않다 VS 나는 타인 때문에 나의 이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상황1과 상황2는 요즘 자주 접하는 말들이다. 특히 2,30대 젊은 세대에겐 금언과도 같다. 그런데 상황1과 상황2는 모두 모순된 주장일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싫으면서, 타인 때문에 손해를 보기 싫은 상황이 서로 부딪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출퇴근길 만원 지하철이 정거장에 멈춰 문이 열렸다. 한 발조차 디딜 곳 없을 정도로 탑승객들이 초만원이다. 내리는 사람 하나 없어 그 틈을 비집고 타려면 이미 타고 있던 승객들을 밀쳐야 한다. 탑승객들의 불쾌함과 불편함을 무시하고 지하철을 타야 학교에 늦지 않는다. 타인 때문에 손해를 보기 싫은데, 타인에게 피해를 줘야 하는 상황이다. 차 한 대 겨우 주차할 공간에 차를 대면 분명 옆 차의 차주는 차를 탈 때 좁은 틈으로 몸을 구겨 넣는 불편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협소한 공간이라도 불법주차 과태료를 내지 않으려면 주차를 꼭 해야 한다. 상황2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장학금 대상자 1순위라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친한 친구가 2순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형편이 좋지 않다. 그 친구를 위해서 장학금을 포기해야 할까? 나의 이익은 친구의 어려움보다 우선인가? 일상에서 이러한 일들은 매일같이 벌어진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나 역시 손해를 보지 않기란 종종, 아니 자주 어렵다. 내가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피해를 봐야 한다. 그게 삶이고 현실이다. 특히 한정된 자원과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최근 한 유명 사립대의 <전장연> 대표 강연 취소 논란 역시 이러한 피해주기, 손해보기 딜레마에 빠져있다. 해당 사립대 에타 자유게시판에 익명으로 올라온 글 중 다수가 <전장연> 대표 강연 추진에 반대했고, 반대 이유로 대부분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가 부적절하고 부당하다는 점을 들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시위를 일삼는 단체의 대표가 대학에서 강연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그 일과 무관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순간 그 주장은 내용과 상관없이 정당성을 잃어버립니다.” 에타 자유게시판에 익명으로 올라온 글쓴이의 주장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시위하면 정당성이 없어진다는 이 주장은 시위 자체의 적법성 여부를 떠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도 역시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모순적일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는, 국가는 바로 그러한 모순을,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와 거버넌스가 필요하고 작동해야만 하는 이유다.
<전장연> 시위는 지하철 탑승객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전장연> 역시 사회적 비난과 조롱을 감수했다. 모두가 피해를 주었고 모두가 손해를 입었다. 피해와 손해는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한다. 정치가 작동해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하철이라는 도시형 교통수단에서 장애인이 온전한 이동권을 얻고자 시위를 한 것은 한정된 자원(국가예산)에 대한 장애인 단체의 정치적 행위다. 정치적 행위란 각자가 옳다고 믿는 것을 추구하는 정의다. “정당성”은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나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정의를 “지속”하고 “발전”시키는 요소다. 정의가 실현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규율과 규칙이 만들어진다. 정당성은 그러한 규율과 규칙의 목적일 뿐이지, 정당성 여부로 정의를 판별해서는 안 된다. 정당성 유무가 정의로움을 결정한다면, 역사 속 그 수많은 독재자의 사법살인은 모두 정의로운 사건이 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정의로운 사건이 되어야 한다.
<전장연> 시위는 정부가 나서서 정의로움을 실현하라는 정치적 요구다. 어떤 시민은 그러한 요구에 힘을 더하고, 어떤 시민은 그러한 요구를 회의적으로 대할 수 있다. 그것 역시 시민의 정치적 행위이고 반응이다. 문제는 소위 말해 명문대가, 언젠가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이 큰 그곳에서 그러한 정치적 요구와 행위를 규율과 규칙의 이름으로 부정하고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리더십이 정의로움보다 정당성을 중시한다면, 그러한 리더십이 이끄는 사회에서 문명과 지성은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역사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정의로운 지성이 문명의 불꽃 같은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대학이 이해관계(利害關係)의 정도와 유무를 따지는 것에 빠지면 불꽃은 사그라들 것이다. 대학은 어리석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마저 포용하고 논의할 지성의 최후 보루다. “전장연은 옳은 주장을 하고 있을 순 있지만, 옳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진 않습니다.”라고 주장한 대학생은 <전장연>의 그러한 주장과 방법을 따져 묻기 위해서라도 먼저 대학 캠퍼스로 <전장연> 대표를 초대했어야 했다. 아예 캠퍼스 문을 닫아 막고, 온라인에서 자신들만 로그인할 수 있는 인터넷 성벽에 숨어, 자기들끼리 <전장연>과 대화와 토론조차 할 가치가 없다고 윽박지를 게 아니라.
글 김우필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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