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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의 시대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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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지평 2022. 9. 2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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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는 한국어 음성을 다시 한글 자막으로 보여주는 자동자막 기능이 있다. 청각 장애인과 한국어가 미숙한 외국인에게 유용한 기능이다. 그런데 비장애인이면서 한국인인 나도 한글 자막이 유용하다. 어쩌면 정보를 인식할 때, 나는 "읽기"가 익숙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눈으로 자막(한글)을 봐야, 귀로 음성(한국어)을 놓치지 않고 그 의미까지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

 

읽기가 보기보다 익숙한 세대

 

"듣기, 읽기, 보기"로 변해가는 존재

나는 "읽기""듣기"보다 선행하는 존재로 학습 받고 성장하였다. "듣기"를 우선하는 존재는 나보다 앞 세대(산업화 이전)이거나 수동적이고 권위에 익숙한 존재들이다. "읽기"는 정보수용자가 자기 맥락적으로 정보를 이해하고 편집하고 활용할 수 있지만, "듣기"는 정보생산자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를 정보수용자가 주의 깊게 듣고 감응한다. "읽기"가 근대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의 실존방식이라면, "듣기"는 전근대적이고 수동적인 주체의 실존방식이다. 그런데 "보기"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익숙한 세대가 등장했고, 그런 존재들이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보기"는 정보를 직관적으로 여겨 이미지화한다. "보기"에 익숙한 존재들은 정보의 의미, 특히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의미를 어렵고 지루하다고 느낀다. 이들에게 정보는 "해석"이 아니라 "상상"의 대상이다. 이미지화된 정보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연상의 대상이기도 하다. 짧은 영상을 제공하고, 바로 관련 영상을 보도록 유도하는 유튜브는 이런 이미지화된 정보를 연상하는 데 익숙한 존재들의 실존성을 대변한다. 틱톡은 그런 유튜브의 또 다른 압축 버전이다. 연상은 이미지의 인접성과 유사성의 연쇄반응이다. 정보의 핵분열은 소음과 충격을 동시에 일으킨다. 이미지화된 정보, 연상 작용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보이기"를 중시하는 피동의식

지금 우리 시대는 "읽기""듣기" 그리고 "보기"를 각각 주된 정보습득방식으로 사용하는 여러 존재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습득 방식의 차이는 정보생산 방식의 차이를 일으킨다. "읽기""쓰기"와 대응하고, "듣기""말하기"와 대응하면서 각각 정보를 생산하는 존재가 실존한다. 그래서 읽고 듣다 보면, 쓰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건 자연스러운 의식의 성장이자 주체성의 발현이다. 쓰고 말하면서 우린 성숙한 시민이 된다. 쓰고 말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보기"와 대응하는 정보생산 방식은 없다. "보이기""보기"의 피동적 행위일 뿐 대응 방식이 아니다. "보이기"는 객체화되고 사물화된 존재방식이다. 그래서 "보기"가 익숙한 존재들은, 점차 "보이기"를 중시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니, 스스로 잘 보이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물건의 사양을 의미하는 "스펙"을 자신에게 요구하고, 그것에 걸맞은 자격들을 훈장처럼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고자 한다. "보기"에 익숙한 존재들은 자신을 이미지화된 객체이자 사물같이 여긴다. 그걸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명품몸매", "공부기계"는 자랑스러운 수식어가 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상상의 세계로 그렇게 자신을 투사한다.

 

세상을 바꾸고 욕망하는 건 읽는 존재

"보기" 세대에게 어쩌면 혁명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혁명은 현실을 상상의 세계로 만들려 하는데, 상상을 현실로 여긴다면 누가 현실을 바꾸려고 할까. 더구나 상상이 현실보다 더 감각적이고 유희적이라면 굳이 현실을 바꾸려 들까. "듣기"의 시대가 지나고, "읽기"의 시대가 지난 이백 년을 휩쓸었다. 이제 "보기"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우린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아니 꿈을 꾸고 싶은 걸까? 상상의 현실에서 이미지화된 객체처럼 살아가는 다수의 존재가 사회구성체를 이룬다면, 민주주의란 또 얼마나 위험하고 형식적인 제도로 전락할까.

더욱 두려운 건, "읽기"의 시대가 저물더라도 "읽기"의 존재는 분명 명맥을 유지하며, "보기"의 시대와 그 시대를 욕망하는 존재들을 조각할 것이라는 점이다. 조각칼은, 공교롭게도 읽고 쓰는 자들의 손에만 쥐어져 있다. 펜은 언제든지 칼로 대체된다. 권력은 쓰는 자들의 몫이고, 복종은 벗는 자들의 값이다.

 

글 김우필(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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