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기억과 지성을 대체하면서 문해력(literacy)은 더욱 뜨거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다. 청소년 문해력부터 성인 문해력까지 모든 세대가 문해력 무기력증에 빠진 듯하다. 심지어 문해력 약화 문제가 주의력결핍과다행동장애(ADHD)나 난독증(dyslexia) 같은 정신장애 병증의 일종인 것처럼 보는 이들도 있다. 의학적 논의는 해당 전문가들에게 일단 맡기더라도, 문해력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분명 필요하다. 다만 그러한 논의가 자칫 IQ 점수를 지능에 대한 우열 평가의 절대 기준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어휘력이나 독해력이 곧 문해력이 아닌데, 그러한 사례를 문해력 논란의 예시처럼 공론화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은 “사흘”을 4일로 오인하거나, “심심한 사과 말씀드립니다.”와 같은 표현을 성의 없는 사과로 인식하는 걸 두고 문해력이 결핍된 대표적 사례처럼 보도한다. IQ 검사도 웩슬러 검사, 스탠퍼드-비네 검사, 레이븐 진행 매트릭스 검사 등 다양하다. 지능에 대한 평가를 단편적이고 획일적으로 할 수 없으니 여러 검사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검사법도 자기가 절대적인 지능 감별법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문해력 논의에서 주의할 점이 바로 이점이다. 어휘나 표현은 사회와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진다. 언어의 사회성과 역사성은 중고등학교 국어 수업 때 배운 기본 개념이다. 사흘을 4일로 오인하는 사람은 사흘 대신 3일로 표현하면 그만이다. 담화 상황과 맥락에 따라 혼동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3일을 사흘로 표현하길 좋아하는 노인이 “three days”란 표현을 못 알아듣고 “뭐가 쓰러져?”라고 반응한다고 그 노인의 문해력을 지적할 것인가? IQ 지수는 한 사람의 우열을 가리키는 지표가 아니다. IQ 지수는 인간 지능의 다양성을 확인하는 지표다.
다양한 IQ 지수는 교육과 학습, 사회 활동에서 우리가 어떻게 다양한 지능을 지닌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살아갈 것인지 그 방법과 태도를 이끌어 준다. IQ 지수로 한 인간의 지능을 규정하거나 평가하는 게 우생학(eugenics)적 오류를 저질렀던 것처럼, 문해력 정도를 인간의 능력으로 규정하거나 평가하는 것 또한 위험하고 경박한 시각이다. “심심한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한 걸 성의 없는 사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문해력 결핍으로 공격하기보다, 다시 맥락을 설명하고 서로 오해를 풀면 된다. 그렇게 서로의 생각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게 어쩌면 진정한 문해력이 아닐까?
언어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획득한 최고의 소통 수단이다. 소통의 목적은 평가나 우열을 가리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주목하고 노력해야 할 문해력은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다. 언어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다. 이해하지 못하니 소통이 어렵다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린 누구도 처음부터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를 이해해서 엄마와 소통하지 않았다. 아기는 엄마의 품에서 엄마와 먼저 소통했고,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글 김우필(명지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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