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가 관찰대상이 되는 상황의 아이러니
보통의 생각과는 달리 시각은 인간 감각 중 가장 추상적인 감각이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결코 사실을,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앎의 체계를 공고히 하는 과정이며, 조금씩 수정해가는 과정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신대륙의 원주민들은 그가 타고 온 거대한 범선을 구름으로 여겼다. 그래서 구름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내딛는 콜럼버스 일행은 하늘서 내려온 신이거나 최소한 신의 메신저였다. 원주민들은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렇게 보았다. 원주민들은 거대한 돛을 펄럭이는 배를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배는 연안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물을 건널 때 타고 다녔던 작은 카누가 전부였다. 범선은 그들의 인식 체계에서 배로 분류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대상이었다. 오히려 바다 저편 수평선에서 하얀 돛을 드리운 채 유유히 해안으로 밀려드는 모습이 구름처럼 보였을 것이다. 덕분에 콜럼버스는 별다른 저항 없이, 아니 오히려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신대륙의 정복자가 되었다. 본다는 것은 앎의 확인이며, 객체를 주체의 인식 체계에 끼워 맞추는 행위다. 대상을 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보는 행위다.
기술적 감각의 탄생과 감각의 추상화
19세기는 지금 현대 사회의 모든 문명과 기술이 탄생한 근대성의 탄생 시기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근대성의 맹아들이 싹트기 시작했지만 19세기는 그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문명과 기술의 빅뱅 시기였다. 조나단 크래리(Jonathan Crary)는 19세기 근대성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카메라 옵스큐라의 발명을 들었다. 인간의 주관적인 시각이 드디어 인간의 감각에서 분리되어 카메라와 같은 기계에 의해서 포착된 사건은 근대적 인간을 출발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관찰자의 기술』, 107-108).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실재인가, 가짜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만든 기술적 감각의 탄생은 주관과 객관의 관념론적 이분법을 극복하여 감각을 ‘이미지’가 아니라 ‘오브제’로 구체화하였다. 카메라 옵스큐라에 이어 시네마토그라프가 등장하면서 시각성은 대중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기 이전에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하는 인식체계의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근대인들은 이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인식할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주관적 감각을 객관화하여 다수의 보편적 감각으로 다시 추상화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지금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확신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위대한 국가의 시민이다.”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만들면서 근대 시민국가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감각의 추상화는, 특히 시각성의 추상화는 기술적 감각이자 동시에 이념적 도구로 활용되는 역사적 과정을 겪게 되었다. 20세기 초 세계를 혼란에 빠트린 파시즘이 대표적 사례이지만 파시즘 해체 이후 파시즘이 이룩한 근대적 감각의 추상화는 20세기 국가와 사회 모델에 깊숙이 유전자를 남긴 채 진화했다.
익숙한 볼거리로서 리얼리티에 현실은 없다
최근 들어 ‘관찰예능’이라고 명명되어 유행하는 방송콘텐츠는 19세기에 탄생한 관찰행위로서 시각문화의 연장이자 기술적 감각의 확장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진짜사나이>, <꽃보다…>, <삼시세끼> 시리즈 등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 모두 오락프로그램으로서 리얼리티 쇼라 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관찰예능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그런데 19세기의 관찰행위가 새로운 볼거리로서 스펙터클을 추구했다면 지금의 관찰행위는 익숙한 볼거리로서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있다. 여행, 군대, 회사, 육아, 전원생활 등은 우리 모두가 한번은 혹은 한 때 일상처럼 보낸 삶의 모습들이다. 이렇듯 너무 익숙하거나 평범해서 재미가 없을 거라 생각되는 이런 소재에 대중들이 흥미를 보이고 열광하는 것은 관찰의 대상인 유명인 혹은 연예인의 모습에서 관찰자인 대중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찰자인 대중이 사실은 관찰대상인 것이다. 대학생 시절 배낭 하나 메고 낯선 곳을 돌아다녔던 해외여행 경험, 익숙한 폭력과 지루함에 시달려야 했던 군대생활, 반복되는 업무와 끝없는 경쟁에 스트레스를 느끼며 다니는 직장생활, 어려운 형편에도 아이와 가족을 보살피며 소시민적 행복을 누리다 언젠가는 한적한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망. 관찰예능 속 관찰대상은 대중이란 관찰자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어쩌면 미래의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관찰예능이 주는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즐거움이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오히려 리얼리티를 가장한 현실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문화자본이란 관찰자의 욕망
관찰대상 속의 삶에는 일상적 절망과 치명적 파국이 생략된 채 웃음과 감동으로 포장된 현실만 편집된다. 그런 편집된 현실을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게 되는 대중이란 관찰자는 매체가 추상화시킨 감각의 현실과 자신의 실제 사이의 괴리감에서 인식의 혼란에 빠지고 만다. 현실을 관찰하지만, 관찰자의 현실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린 서로 다른 이러한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기보다 우리의 현실을 관찰 대상의 현실에 맞추고자 한다. 추상화된 감각이 객관적 현실을 압도해버린다. 관찰예능 속 연예인은 어느덧 콜럼버스가 되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대중문화는 파시즘처럼, 보편화된 감각의 제국을 형성한다. 드론 헬리캠이 보여주는 조감도와 같은 세상은 리얼리티를 가장한 스펙터클이며, 스펙터클을 가장한 문화자본의 욕망을 화면 가득 펼쳐 놓는다. 화면을 채우는 것은 유명인의 일상이지만 그 일상은 문화자본이 만든 세트 속 무대이다. 대중으로서 우리는 여전히 관찰 대상일 뿐이다. 19세기 이래 관찰자로서 자본과 관찰대상으로서 대중의 지위는 거의 바뀐 적이 없다.
글 김우필(문화평론가, 명지대 객원교수, <생각의지평>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