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속물주의에 빠진 대중매체 복고현상
리얼리티쇼 프로그램은 2010년 이후 최근 3~4년 동안 방송을 중심으로 오락성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리얼리티쇼 프로그램은 비단 한국만의 유행은 아니며 전 세계적인 유행 현상이다.* 유명 연예인과 방송전문인들만의 독차지였던 프로그램 출연진을 평범한 보통사람이자 일반인들로 구성하면서 방송은 리얼리티의 진실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유명 연예인조차 일반인의 일상을 향유하도록 만들어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진실성을 기획(!)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논픽션을 가장한 픽션인 페이크다큐시네마(fake documentary cinema)가 리얼리티를 극대화한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으로서 리얼리티를 왜곡하거나 과장시켰듯이, 방송계의 리얼리티쇼 프로그램은 구성된 리얼리티로 골치 아픈 현실적인 문제 대신, 현실 너머의 문제를 더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의 일상을 사는 연예인의 모습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구체적 현실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연예계 선배를 대할 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는 게 시청자들 눈에는 품성 좋은 연예인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게 만약 일반인이 겪어야만 하는 현실이라면 위압적인 분위기와 권위적인 대인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선배 앞에서 긴장한 후배 연예인을 보며 우린 순간 웃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그런 선배와의 만남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리얼리티쇼 프로그램은 이러한 기획된 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복고현상은 향수 마케팅, 아니면 과거에 대한 오마주이거나 패스티시?
케이블 프로그램 중 처음으로 시청률 두 자리(최종회 방송 10.4%)를 기록한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시작으로 2013년부터 부각되고 있는 복고풍(retro) 문화콘텐츠 유행현상은 리얼리티쇼 프로그램의 새로운 콘텐츠로 활용되고 있다. 복고풍은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기본적으로 추억 혹은 향수 마케팅의 일환으로 등장한 문화상업주의 전략 중 하나다. 복고풍은 주로 패션과 음반 산업이 새로운 대안이 될 아이템을 찾기 전까지 기존의 킬러 콘텐츠와 차별화된 과도기적이며 임시적인 아이템이었다. 한편 복고풍은 과거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나, 지배했던 문화나, 부각됐던 정신에 대한 오마주(hommage)이거나 패스티시(pastiche)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동차 회사가 가끔씩 과거 모델과 유사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신차를 만드는 일이나, 작가가 유명한 작품의 내용 일부를 직접적으로 모방하여 차용행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 모두 이러한 복고풍 현상의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방송계가 지금 보여주는 복고풍은 새로운 킬러 콘텐츠 개발을 위한 임시적 대응으로 보기에 너무 길고(2013년~), 많아(드라마, 예능, 대중음악 등등) 이젠 부담스러울 정도다.
과거를 특정하게 추억하도록 강요하는 대중매체
지난 20세기에 대한 오마주이거나 패스티시라 보기에 복고풍 소재로 등장한 대상과 주체가 과연 그 시대를 대표하고 상징한다고 할지 의문이 든다. 70년대 서울 강남 말죽거리 고등학생 문화가 어떻게 한국의 70년대 십대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될 수 있을까? 60~70년대 서울 명동 음악다방 쎄시봉이 어떻게 한국의 60~70년대 청춘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90년대, 힙합과 테크노 댄스음악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즐겨듣던 대중음악의 중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60~70년대 서울은 분명 한국에서 가장 번화하고 큰 도시였지만 지금처럼 대중문화가 서울 중심적이지 않았고, 강남 졸부보다 강북 서민이 서울문화를 대표했으며, 90년대 대학가는 민중가요와 록음악이 이상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위험한 동거처럼 함께 유행했다(최소한 필자는 그런 90년대를 관통하며 당대 문화를 흡입했던 증인 중 한 명으로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떤 문화가 그 시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지 선고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한 시대의 공기를 흡입하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추억할 권리만 있을 뿐이다.
복고는 과거를 퍼서 현재에 담는 물음이자 응답
누구의 권리를 더 보편적으로 인정할 것인지 따지는 것만큼 어리석고 유치한 기억싸움은 없다. 이제는 대중매체가 조장한 획일화된 기억 속에서 한 시대의 문제가, 그 시대의 현실성과 시대정신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되고, 지금 여기로 호명되어,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든 살아갈 것인지, 묻는 계기가 복고와 함께 이루어졌는지 물어야 할 때다. 대중매체가 복고풍을 유행시키고 과거를 현재로 호명해 올 때,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도록 만드는 일이 대중문화가 복고란 미명 하에 단순한 추억팔이 행위에 빠지지 않게 만드는 자세다. 사실 최근 일련의 복고풍 문화는 깊고 장기화된 불황 속에서 지난 20세기 중후반, 경제호황기 물질적 풍요와 문화적 격변을 겪은 지금의 장년기(30대 중반~50대 중반)에 속한 사람들에게,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대리만족적인 위로이자 현재의 고통을 잠시 잊게 만드는 진통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청자 모두가 각자의 ‘가요무대’를 시청하며 옛 노래를 흥얼거리며 시름이나 잊으려 하는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도 생기 있지도 않다. 21세기적인 방송형식이라 할 수 있는 리얼리티쇼 프로그램이 연예인 원맨쇼에 머물거나 복고풍이라는 추억팔이에 빠지는 일이 한국에서는 어쩌다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일까.
빈티지 속물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 되어 사는 법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짧은 역사를 감안했을 때, 한국 대중문화의 밑천을 복고로 너무 빨리 드러낼 경우 대중의 문화적 감각이 근거 없는 한국적 판타지에 매몰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적 판타지에 갇혀 점점 문화적 색맹이 되어간다면 대중의 문화적 안목은 빈티지 속물에 머물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초래한 정치경제적 현실을 탓하지 않을 수 없지만 문화적 풍요로움을 얼마든지 창출해낼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어쩌다 우리의 대중문화가 이렇게 빨리 보수화되는 노화증상을 겪게 되었는지 대중문화의 생산과 소비 주체 모두도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본래 문화는 역설적으로 문화가치를 외칠수록 더 저급해진다. 마치 스스로 원조를 외치는 식당이 많아질수록 원조가 희화화되듯 문화 역시 문화가치에 대한 목소리 크기만큼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다. 복고 역시 새롭다고 느껴지려면 과거의 한 시대를 드러내고 흉내 내기보다 그 시대를 재해석하고 현재에 접목시키는 시도가 필요하다. 시간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채 앞으로만 흘러가는 게 시간의 본질이다.
글 김우필(문화평론가, 명지대 객원교수, <생각의지평>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