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과호흡 중 : 배시은, 『소공포』, 민음사, 2022
시인은 언어를 들이쉬고 내쉬며, 산다. 호흡하듯 언어를 들이고 내뱉는다. 어떤 언어는 들숨이 되고, 어떤 언어는 날숨이 된다. 어떤 언어는 산소가 되고, 어떤 언어는 이산화탄소가 된다. 호흡은 생존의 수단이 아니다. 호흡은 그저 공기가 들고 나는 반복에 붙는 개념이다. 개념은 시인과 불화한다. 랑그를 잃어버린 혹은 내던져버린, 고장이 난 언어로 중얼거려야 하는 운명. 시인은 고장이 난 언어를 고치려다, 고장 내고, 다시 고치려다, 고장 내는 자신을 고장 낸다.
목숨이 있는 청춘이 운다 그들의 피가 뜨거운지라 부패뿐이다 생명을 못할 구하지 못하는 말이다 능히 되려니와 무엇을 그것을 있으랴? 따뜻한 얼음 무한한 아름다우냐? (「한글입숨」 중)
무의미한 언어란 없다. 자음과 모음이 결탁한 우주는 너무 커서 그저 만나지 못할 언어만 있을 뿐. 빛의 속도로 달려오는 어제의 모습을 보며, 너였구나, 너로구나, 하며 지그시 눈으로 더듬고 핥으면 된다. 부러진 문법에 눈살을 찌푸리지 말고 부서진 음절을 더듬거리다 보면 어느 우주 속, 기적처럼 자음과 모음이 나누는 사랑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akzkeka는 인파가 빠져나간 자리를 뜻한다 (중략) akzkeka는 빈 공간을 상정할 때 그 공간이 정말 비었는가에 대한 의심을 뜻한다 (중략) akzkeka는 보통의 기적보다 덜 기적을 뜻하다 (중략) akzkeka가 뜻하는 기적은 목도하더라도 그 정도로 놀랄 것까지는 없을 만큼의 기적이다 (「akzkeka」 중)
부러 오타를 유도하듯 키보드 언어 스위치는 암어(暗語) 장난을 즐긴다. “akzkeka(마카담)”은 진동롤러이거나 견과류 이름이 아니어도 충분히 “악”하고 “카”악하다. 의미란 각자의 파롤이 랑그와 투쟁하다 흘린 피의 흔적. 시어는 그 흔적의 기록이자 모험담이다. 시인은 그 싸움의 최전선에서 경계를 허물고, 불화를 일으키다가, 다시 화해하는 척 의미를 수혈한다. 피가 돌면 다시 말을 먹고 뱉으며 말의 단내를 빤다. 살아 있는 말, 죽어 가는 말, 산소가 되는 말, 이산화탄소가 되는 말, 온갖 말들은, “물음표는 책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어떤 힌트도 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 단지 물음표는 무언가 묻고 있다는 인상을 줄 뿐 / 단지 물음표는 / 시각적으로 조금 강렬할 뿐”(「물음」 중)이며, “그는 문장 하나를 쓴 뒤 / 그 문장을 변주해 나가면서 / 그저 나열한다 / 그것은 증명서나 / 서약서 같지는 않다”(「모든 것을 하는 것」 중)고 항변하며, 그저 “그는 인용만으로 책 한 권을 쓴다 그러나 그것으로 책임을 나눌 수는 없다는 걸 안다 // 원고 위에 철책을 그린다”(「네 얼굴 작은 점들로 이루어져 있고」 중). 간혹 랑그와 화해하고자 “추위. / 나는 이 추위를 문장으로 재현하려 했다 // 추위는 찬 느낌. / 추위는 찬 느낌에서 조금 더 찬 느낌. // (중략) 아무것도 없네. 없다고 하자마자 없어지는 것들밖에. 이 빈 것을 ‘이미지’라고 부르는 수밖에.”(「추위」 중) 하며 재현과 이미지를 소환한다. 재현과 이미지는 의미의 세계를 만든다. 재현은 이미지에 화장(化粧)을 입히고, 이미지는 재현을 춤추게 한다. 우리는 그런 의미의 세계를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장은 분장이 되고, 춤은 발작이 된다. 의미가 마모된 세계,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 영원히 주체일 수 없는 나. 언제나 객체인 우리.
무엇이든 액자에 가둬 봐 / 「이렇게」 / 「그럴듯하게」 // 마지막 날을 피해서 「마지막 날 전날의 전시장」에 왔다 // 작가의 일생이 벽에 붙어 있다 / 작가는 「작가의 일생」에 동의한 적 있을까? // 누가 알아냈나 나의 일생을? // (중략) 작품들이 나를 지나간다 // 전시 요원은 전시를 관람하는 나를 관람한다 // (중략) 이 작품은 너무 유명하여 감동받기 어렵다 / 유명한 것은 훌륭해지기 힘들다 // (중략) 나는 이 작품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해 버렸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해 버렸다> 중)
시어의 반복은 차이를 만든다. 순서, 위치, 간격 등. 반복은 의미 없어 보이는 시어에 의미를 부여한다. 나열은 반복을 변주하며 의미를 갉아먹는다. 마모된 의미의 세계가 무의미로 추락하지 않는 건 멈추지 않는 반복, 그 반복이 다시 의미를 살찌우기 때문이다. 심장은 뜨거워서 뛰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뛰어 피가 식지 않을 뿐. 반복은 낡은 의미의 세계, 그 세계를 점령한 법칙에 물음을 던진다. 심층적이며 예술적인 어떤 실재를 위해 법칙을 고발한다.
나는 화자가 아니다 나는 인터넷 그리고 신체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어떤 사실은 알려져 있고 어떤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의견을 가질 수 없다 의견을 갖는 순간 그 의견이 간과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화자가 아니다 (「현재형 일기」 중)
“나는 화자가 아니다”를 기준으로 반복되는 「현재형 일기」의 변주는 벌어진 문장의 틈, 그 간격과 또 다른 간격들을 잇는 막다른 미로에 갇힌 화자의 물음들로 가득 차다. 물음은 문장 끝, 종결어미가 아닌 문장과 문장 사이 틈으로 호명된다. 그 물음은 답을 원하지 않고 그저 답을 비우고자 한다. 이미 차 있었던 답은 낡은 의미다. 수선할 수조차 없는, 주인을 잃은, 어쩌면 버려진 개념이다.
「소공포」는 33쪽, 39쪽, 72쪽에 다시 써진다. 「해체전」은 90쪽, 99쪽에 다시 써진다. 「은점토」는 34쪽, 116쪽, 120쪽에 다시 써진다. 이들 시는 제목이 아니라 페이지로 명명되어야 한다. 명목적 개념으로서 제목은 시간과 함께 변한다. 어제의 제목은 내일의 제목과 같을 수 없다. 시인의 생각과 삶이 달라지듯 자음과 모음이 결탁한 똑같은 제목은 이 세상에 없다. 똑같은 제목의 시가 여러 편 있는 게 아니다. 똑같은 제목처럼 보이는 다른 시가 있을 뿐이다. 제목의 반복은 내면성을 획득하는 변주다. 시인은 반복으로 의미의 세계를 억압하고 망각한다. 우리를 속박하고 파괴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규정하고 복종케 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일 역시 반복이 일으키는 조짐이다. 어떤 징후다.
그들 중 하나의 생각밖에 알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 더 좋은 건 없어. / 그들 중 하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옆에 있다. 그런 다음 꽤 편안하다. // (중략) 나아진 게 없어. / 여러분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똑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 (중략) 그들 중 하나의 생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 그들 중 하나는 왜 그들이 똑같이 생겼는지 알 수 있다. / 그들은 유일하다. (「소공포」 72~73쪽)
시인은 오늘도 언어를 들이쉬고 내쉬며, 살 것이다. 시인의 호흡은 어제의 호흡과 다르다. 어제의 들숨은 오늘의 들숨이 아니고, 어제의 날숨은 오늘의 날숨이 아니다. 공기가 들고 나간 자리는 공기를 계속 욕망한다. 시가 들고 난 자리는 시를 계속 욕망한다. “들어갈 때 나는 완전한 적막 속에 혼자 놓인다. / (중략) 나는 내가 무엇을 소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또 그것을 안다 해도”(「역소원」 중) 괜찮다, 몰라도. [끝]
글 김우필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