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무겁거나 혹은 가벼운 책읽기의 강요-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
지난 2012년 2월, EBS FM은 제2의 개국과 맞먹는 혁신적 개편을 시도했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무려 12시간 동안 FM 104.5MHz 주파수를 책 관련 프로그램으로 할애한 것이다. 그리고 전체 방송 프로그램을 아우르는 콘셉트로 <책 읽어주는 라디오>란 명칭이 붙여졌다. ‘라디오가 책을 읽어준다’는 사동형 문장의 명사화된 명칭은 ‘누구에게’, 그리고 ‘왜’란 빈칸을 채우며 2013년 여름까지 일 년 반이란 시간 동안 세밀한 변화와 적응을 거치며 진화하는 중이다. 방송수신료 가운데 7%를 정부에서 지원받는 공영방송이자 공중파방송으로서 EBS 라디오는 그러한 변신의 이유와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요즘 현대인들은 인터넷을 하며 일을 하고 동시에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등 매우 다양한 일을 한꺼번에 한다. (중략) 오디오는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에 적합하다. (중략) 책은 그 자체로 무궁무진한 콘텐츠이자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기에 라디오 경쟁력도 높여줄 것이다. (중략) 어린이 교육과 다큐멘터리를 주로 방송하는 TV와 달리 FM은 평생교육이라는 공익적 목표에 집중하고자 한다.”1)
EBS 측에 따르면 <책 읽어주는 라디오>는 성인들의(누구에게) 평생교육(왜)을 위해 탄생한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EBS 라디오의 이와 같은 포부는 1920년대 한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공중파 방송을 시작한 이후부터 줄곧 시도된 계몽의 역사 혹은 유희의 역사 주파수 대 그 어느 틈에 위치할 뿐이다. 라디오 수신기가 부르주아 계급의 상징자본이었던 식민지 시대, 한 신문사 기자는 <책 읽어주는 라디오>와 같은 당시 라디오 문예극을 다음과 같이 촌평하기도 했다.
“아직은 우리들의 중류계급에서 이런 지식적인 근대극을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의 교양 있는 사람들뿐으로 금일의 라디오 드라마는 그들만이 겨우 향락하고 있지 않나?”2)
한편 광복 이후 라디오 수신기가 더 이상은 부르주아 계급의 상징자본이 아니라 국가의 미디어 통치수단이 되었던 1960년대, <인생역마차>, <청실홍실>과 같은 라디오 방송극이 대중문화의 주류를 차지하던 때도 있었다. 귀로만 듣는 드라마 시대의 산물인 라디오 문예극 혹은 방송극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TV연속극에 자리를 내준 1970년대 이후부터 라디오의 책읽기는 유희적 드라마에서 계몽적 교양에 가깝게 주파수를 조정하였다. 학생들을 위한 교양도서를 소개하고 읽어주는 일련의 교육용 프로그램들이 1980년대 라디오 책읽기 프로그램의 대세였다면, 1990년대는 SBS AM <책하고 놀자> 프로그램처럼 유명 작가가 직접 라디오 객원 MC을 맡아 오늘의 베스트셀러, 신간안내, 출판계 소식 등을 전하는 출판물 홍보용 프로그램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는 1980년대 이후 라디오 책읽기 프로그램이 보여준 계몽의 기획과 1980년 이전 시대 유희의 문화 그 사이 어디쯤에서 방황하거나 혹은 진화하는 중이다. 이러한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의 주파수 찾기는 ‘책’이라는 시각매체와 ‘라디오’라는 청각매체가 앞으로 형성할 좌표의 위상이기에 대중의 감각을 실험할 의미 있는 ‘문화적 인터페이스’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일 년 반 동안 진행된 이 실험은 익숙지 않은 IT 기기의 인터페이스처럼 소수 마니아들의 취향으로 고립된 듯하다. EBS TV 유아용 애니메이션으로 2000년대 최고의 킬러콘텐츠가 된 ‘뽀로로’나 공교육 강화를 목표로 정책적으로 지원받아 급성장한 EBS 수능 프로그램 정도의 위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EBS TV의 평균 시청률이 1.96%에 비해 EBS 라디오 평균 청취율이 불교방송 라디오 청취율 0.6%보다 낮은 0.3%인 것은 2012년 2월 <책 읽어주는 라디오> 콘셉트로 개편할 당시의 포부에 비할 때 너무나 초라한 결과가 아닐까.3) 저조한 청취율 원인에 대해 EBS 라디오 관계자들은 다양한 변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홍보 미흡, 교양 프로그램의 특수성, 개편 효과의 시기상조성 등등. 현재 공중파 방송 중 유일하게 라디오 드라마 형식의 책읽기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의 부진을 일일이 해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양한 매체들 간의 멀티플랫포밍multiplatforming 현상이 증가하고, 인문학이 새로운 지식패러다임으로 부각되고, 문화적 교양이 강조되는 시대에 이 모든 조건에 대한 가장 적확한 대응처럼 보인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의 부진을 방송제작 관계자들 탓으로 돌려야 할까? 아니면 방송기획을 조장한 작금의 현실과 대중문화의 어떠한 프레임 문제로 보아야 할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최고의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 대신 이 문제를 좀 더 직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명사화된 EBS 라디오 콘셉트 명칭을 다르게 배치하여 다시 서술해본다. 라디오는 무슨 책을 읽을 것인가? 라디오는 책을 어떻게 읽어줄 것인가? 그리고 라디오는 책을 왜 읽으려 하는가?
문화적 상업주의의 팬덤현상
개편 시기마다 세부 프로그램이 조금씩 변하는 부침을 겪어왔지만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의 세부 프로그램 현황을 보면 라디오드라마 형식의 낭독이 주를 이룬다. <소설 마당-판>, <단편소설관>, <라디오연재소설>, <영미문학관> 등이 대표적이다. <소설 마당-판>은 장편 혹은 대하 역사소설을 일부 각색하여 라디오드라마 형식으로 낭독하며, <단편소설관>은 국내 혹은 국외의 우수 단편소설을 발췌 요약하여 낭독하는 프로그램이다. 한편 <라디오연재소설>은 국내 유명 작가의 미 발간 신작 소설의 전문을 낭독하는 프로그램으로 EBS <책 읽어주는 라디오>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은희경, 천명관, 고종석, 황석영, 박범신, 김주영 등 이름만 거론해도 해당 프로그램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또한 <영미문학관>은 영어권 우수 문학작품을 영어 원문 그대로 낭독하는 프로그램으로 외국어 교육과 책읽기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기획의도가 엿보인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몇 번의 세부 개편에서도 폐지되지 않고 가장 오랫동안 방송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프로그램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라디오드라마 형식의 낭독을 고수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필요에 따라 책장을 넘기고 책을 덮을 수 있지만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는 필요에 따라 방송을 시작하거나 멈추게 할 수 없다. 그 차이 때문에 라디오에서 책읽기는 책을 점유하는 독자 대신 책을 소비하는 청취자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장 보드리야르도 지적하였듯이 현대인의 소비행위는 기호를 전이하거나 매개하는 행위이며, 소비하는 현대인은 그러한 기호 매개자에 불과하다. 책 읽어주는 라디오는 기호로서 책을 기호 매개자인 청취자에게 전달하는 트랜스미디어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트랜스미디어는 하나의 이야기가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교체되거나 혼종화를 일으키는 문화적 컨버전스의 대표적 현상이다. 사실 트랜스미디어 혹은 문화적 컨버전스 현상은 다양한 미디어의 등장과 경쟁적으로 미디어 산업에 뛰어든 기업들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의 콘텐트를 여러 형태로 변용하기 시작한 마케팅 전략과 상업주의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콘텐트의 부족보다 상업적 이익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트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확보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양질의 콘텐트는 곧 미디어를 지속적으로 소비하게 해줄 ‘재미있는’ 콘텐트이지 윤리적 콘텐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콘텐트란 무엇인가? 아니 재미란 무엇인가?
사실 재미란 무엇이냐는 존재론적 물음만큼 재미없는 질문은 흔치 않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어 본다. 무엇이 재미있냐? 현상학적인 직관이 물음표에 말줄임표를 달고 질주하다보면 황홀경에 빠져 교주를 응시하듯 TV와 극장 스크린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 모두는 ‘스토리’란 마법에 빠진 사람들이다. 스토리는 재미있다. 재미의 본질이 스토리는 아니지만 재미있는 것들은 모두 스토리를 가진다. 그래서 미디어 기업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금맥 찾듯 재미있는 스토리에 집착한다. 스토리는 넘쳐 나는 미디어 시장에서 지속가능한 이윤 확보와 확장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면서도 안전한, 심지어 하나의 스토리로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고, 인간의 상상력이 두뇌에서 퇴화되지 않는 한 결코 마르지 않을 고효율 상품임에 틀림없다. 스토리는 지속가능한 상품생산과 소비의 무한 사이클이 필요한 트랜스미디어의 DNA가 되어 기업자본의 놀라운 복제기술로 무한증식 한다.
한편 모든 스토리가 내러티브 양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시간, 공간, 캐릭터를 중심으로 정밀하게 결합하거나 분해할 수 있는 스토리라면 분명 내러티브 양식을 지닌다. 한 권의 소설이 영화나 TV 드라마, 혹은 게임이나 관광테마파크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은 트랜스미디어 현상이란 기술적 개념을 붙이기 이전에 이미 내러티브의 속성이자 힘이다. 그래서 <소설 마당-판>, <단편소설관>, <라디오연재소설>, <영미문학관>이 라디오드라마 형식으로 책을 낭독할 때, 스토리 소비자인 청취자는 내러티브로 포장된 기호의 매개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다만 소설이 라디오란 매체를 통해 드라마 형식으로 트랜스미디어 과정을 거치며 소비될 때, 청취자는 겨우 온라인 게시판에다 낭독자의 연기력을 칭찬하거나,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팬심’을 광고할 뿐이다. 또한 유명 작가가 직접 스튜디오에 나와 청취자들과 함께 자신의 소설을 낭독하는 이벤트로 더 유명해진 <라디오연재소설>은 라디오로 중계해주는 ‘팬미팅’을 ‘책읽기’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스토리를 소비하는 청취자들은 그 흔한 상품평가 별점 하나 제대로 매기지 못한 채 칭찬부대, 박수부대로 전락하고 스토리 산업의 들러리 역할에 빠져 있다.
재미있는 콘텐트로서 스토리는 무한한 보고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작가는 노다지 만드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노다지를 캐어 다양한 수익을 추구하는 미디어 역시 어쩌면 생존본능을 잘 따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청취자 혹은 소비자한테까지 재미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스토리는 재미있지만 모든 스토리가 재미있지는 않다. 재미없는 스토리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재미없는 스토리를 만든 작가를 공격하고, 재미없는 스토리를 만든 작가를 광고하는 미디어를 비판하는 것은 청취자들의 몫이다. 그것이 바로 소비자들의 윤리이다. 그래서 콘텐트의 재미를 판단하지 못하는 소비자나 콘텐트의 재미를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미디어는 거짓 재미를 방관하고 유포시킨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문화적 상업주의의 팬덤현상이라서 유죄가 아니다. 소비자가 참여하지 못한 거짓 재미를 조장한 팬덤현상이라서 유죄인 것이다.
유명인 멘토 공화국의 힐링 독과점 체제
요즘처럼 ‘공감’이란 말을 거리의 전단지만큼 너저분하게 남발하던 때가 또 있었을까. 소통의 문제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제지만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이룬 역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개인의 감각이 집단 속에서 습득되고 문화 속에서 형성될지라도 ‘나’의 감각이 ‘너’의 감각과 완전히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의 주체는 늘 개인의 몫이고, 타자와 집단과 사회는 그러한 주체의 감각들이 서로 비가역적으로 결합한 물리적 반응만을 감지할 뿐이다. 그래서 공감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공감의 당위성만 공감할 뿐이다. 문제는 맹목적인 공감이 아니다. 무엇을, 무엇을 위한 공감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다.
발전의 시대가 낳은 온갖 산업폐기물을 청소하듯 공감의 시대는 문화콘텐츠로 몸과 맘을 정화하라 한다. 그리고 독서는 문화콘텐츠를 향유하는 가장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실천처럼 추앙된다. 한국인의 월평균 독서량이 한 권도 채 되지 않는다며 독서 캠페인을 벌이고,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독서경연대회를 열려 하고, 책읽어주는 택시까지 등장하는 한국의 독서만능주의는 이념도, 지역도, 계층도 초월하는 신앙이다. EBS 라디오 캠페인 중 한 청취자는 “바쁘기도 했지만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한다. 독서를 많이 못 하는 게 왜 미안한 일인가. 그 멘트를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동시에 독서를 강요하는 사회를 대신하여 그 청취자에게 사과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책은 이제 수많은 미디어 중 하나일 뿐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는 이미 종이책의 지식정보 전달력을 초월하고 있다. 더구나 영상정보는 문자정보보다 더 빠르고 실감나게 지식정보를 전달해준다. 무엇을 읽는지는 변한 게 없다. 어떻게 읽느냐만 변했을 뿐이다. 매체 형식이 바뀌면 내용도 바뀔 거라고 50년 전 매클루언은 예언을 하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고전을 읽고, 현대판 신화인 판타지 소설에 열광하며, 시를 읽고 있다. 공감의 역사가 종말하지 않는 한 읽기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다만 그것이 더 이상은 책이란 사각형 모양의 종이묶음에만 국한된 읽기가 아닐 뿐이다. 지식정보를 습득하는 행위를 독서라고 한다면 이제 독서는 읽기에서 듣기, 보기, 심지어 만지기 등 다양한 형태로 독서행위의 감각이 확장되고 있다. 책읽기만을 독서로 보는 시대는 인터넷의 대중화와 함께 종말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TV는 역설적이게도 종이책읽기를 무력화시킨 장본인이면서 동시에 종이책읽기를 조장하는 미디어다. 유명인들은 멘토란 직함으로 시청자들을 힐링한다. TV는 힐링을 중계하고 인터넷이 멘토의 힐링비법을 담은 책을 소개하면 어느 틈엔가 출판사와 멘토는 힐링의 대가를 돈 혹은 유명세로 지불 받는다. TV가 기획하고 인터넷과 출판업계가 후원하는 힐링산업의 중심에는 종이책읽기, 다시 말해서 베스트셀러만들기 전략이 작동한다. EBS <책읽어주는 라디오>의 장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청취자가 읽어주는 한 권의 책>과 <명사가 읽어주는 한 권의 책>은 그런 점에서 유명인사로 포장된 멘토의 책읽기 힐링과 청취자의 힐링 체험담이 교회의 간증 모임처럼 공감 릴레이를 이룬다. 한 권의 책이 자신의 생각을, 나아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밝히는 고해성사를 불특정 청취자들이 왜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안타깝지만 그러한 힐링체험 고백을 듣는다고 쉽게 공감할 만큼 우리의 상처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자신만의 책읽기 감각이 모두의 감각 속에 울림을 주려면 한 권의 책으로 삶의 진정성을 찾은 것처럼 포장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생활의 치열함으로 책의 메시지를 논할 때 어설픈 공감타령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는 한 줌의 도덕적 울림이라도 남지 않을까.
언젠가는 TV와 출판업계의 힐링타령도 사그라질 것이다. 대신 고해성사를 닮은 라디오의 힐링타령은 좀 더 오래 지속될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처럼 EBS <책읽어주는 라디오>가 계속 콘셉트를 유지하고 청취자와 멘토의 책읽기 캠페인이 계속된다면 종이책읽기는 신비로운 마음의 치료약 정도로 계몽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EBS <책읽어주는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들은 책을 좋아하는 청취자들이 아니라 책을 동경하는 청취자들이고, 책을 자주 읽는 청취자들이 아니라 책 읽을 시간조차 빠듯한 청취자들이다. 책을 동경하고, 귀로라도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책읽기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힐링이 아니라 오히려 훈계다. 힐링하려면 먼저 상처부터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과 실제적 삶이 지금 우리를 파상적으로 할퀼 때 힐링보다 급한 건 최소한 똑같은 상처를 두 번 다시 입지 않는 일이다. 거대한 종합병원처럼 힐링을 권위로 독점해서는 안 된다. 슬프게도 책 몇 권, 멘토의 인상적인 말 몇 마디에 아물 만큼 우리의 상처가 그리 호락하진 않다.
문화의 재활용, 문화 죽이기
우리의 대중문화는 진보 중인가, 아니면 진화 중인가? 도킨스는 진화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진화(evolution)를 진보(progress)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생물학적으로 진화는 너무나 느린 변화여서 나이가 들면 조금씩 생겨나는 눈가의 주름처럼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더구나 진화는 부모 세대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누적되는 변화이지 하루아침에 번데기를 뚫고 성충이 되는 변신이 아니다. 이러한 진화에 비해 진보는 오히려 혁신에 가까운 변화다. 진보는 분명한 방향성을 지닌다. 기존의 프레임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는 때로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자기를 구하려 한다. 자기부정이 곧 자기긍정의 원동력이 된다. 진화의 아름다움이 주체가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다면 진보의 힘은 주체가 현실을 변용시키는 결과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와 진보의 차이는 공교롭게도 우리의 대중문화가 걸어온 서로 가지 않은 길이자 결코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기도 하다.
EBS <책읽어주는 라디오>가 외국어교육 대신 평생교육을 콘셉트로 잡았을 때, EBS 방송관계자들은 아마도 책읽기 프로그램으로 커리큘럼을 구성하는 것이 평생교육을 실시하는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한국의 현대 대중문화 역사에서 독서가 대중을 교양하는 데 최고의 방법이라는 의식은 식민지 시절 신문잡지의 국문운동과 전후 백과사전 보급과 번역물 출판 유행에서 이미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독서는 학교를 졸업한 성인 대중이 보편적인 학교 지식을 다시 습득하거나 유행적인 새 지식을 습득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의 이러한 지식의 재교육, 유행적 문화의 교양화를 르시클라주(recyclage)라 명명했다. EBS <책읽어주는 라디오>의 <고전읽기>와 <국어교과서 작품낭독>과 같은 프로그램들은 문화의 르시클라주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인문학 교육, 인문학 서적 읽기와 같은 인문학 유행에 발맞춰 동서양의 고전과 국어교과서 작품을 읽는 것은 성인 대중이 유행적 문화의 교양을 습득하면서 동시에 재교육을 받는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보드리야르도 지적하였듯이 문화의 르시클라주는 전통의 유산과 비판적 사고를 쓸모없게 만들어버린다. 고전을 읽고, 교과서 문학을 다시 읽는 것 자체가 문제란 뜻이 아니다. 인문학 열풍 때문에 유행처럼 고전을 읽는 것, 더구나 고전 그 자체도 아니고 다이제스트로 엮은 고전 요약본을 읽는 것은 오히려 고전 속 의미 있는 찬란한 유산을 표백된 장식으로 소외시킬 뿐이다. 또한 교과서 문학을 재교육 수준에서 다시 읽는 것은 학창시절 입시문학을 현재로 소환하여 자습서 수준의 해설을 추억하게 할 뿐 오히려 문학적 다양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경직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부작용은 평생교육이란 미명하에 고전과 교과서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최소공통문화만을 유지 혹은 갱신하려는 대중문화의 경박함이 유행적 문화의 교양화로 점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전읽기와 인문학 열풍에 동참해야 교양인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교과서 작품을 유일한 문학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대중문화는 진화도, 진보도 기대하기 어렵다.
문화적 유산과 함께 조금씩 늙어가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문화적 비판으로 뜨거워지는 사람들은 힘이 넘친다. 문화를 그저 교양을 유지하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여기는 대중들과 그런 대중의 시대를 반성 없이 용인하는 지식인 그리고 미디어는 문화를 화석화시킨다. 어쩌면 문화는 마음껏 소모되고 충분히 소진되어야 한다. 바닥이 드러나야 다시 채우고자 하는 열정의 심지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약 연료가 부족하다면 최소한 느린 진화처럼 앞 세대의 유산을 자양분 삼아 현실에 맞게 조금씩 변하는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EBS <글쓰는 라디오>
올해 초 봄 개편에서 KBS <즐거운 책읽기> 프로그램이 폐지되면서 공중파 방송으로 진행하는 책읽기 프로그램은 EBS <책읽어주는 라디오>가 유일하다. 라디오 책읽기 방송으로 유명한 영국 BBC Radio 4의 방송포맷을 벤치마킹하면서 EBS 라디오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시도한 <책읽어주는 라디오>도 어느덧 세 번째 개편을 맞이했다. 사실 봄가을 개편 시즌 때마다 EBS <책읽어주는 라디오>가 어떻게 변할지 주목하면서 한편으로는 <책읽어주는 라디오> 콘셉트 자체를 포기하고 바꾸지는 않을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많은 문제들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중파 방송의 책읽기 프로그램은 문자세대, 라디오드라마 세대에겐 흥미로운 방송 콘텐트이다. 대중문화콘텐츠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분명 책 읽어주는 라디오는 필요하다. 그러나 공중파 방송의 공공성 측면에서 책읽기는 여러 유혹과 오해의 도가니에 빠지기 쉽다. 무슨 책을 선정할 것인가는 물론이고 누가 어떻게 읽을 것인지조차 공공성 시비를 일으킬 수 있다. 책읽기를 순수한 지식쌓기, 내면쌓기 정도로 보기에 출판은 이미 거대 자본의 휘하에서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문화산업을 진두지휘하는 스토리텔러 조직을 갖추었다. 10만부 팔리는 베스트셀러도 드물다고 출판계 불황을 주장하지만 책과 함께 콘텐트 멀티플랫포밍이 활발해지면서 출판은 더 이상 종이책 판매 기업으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디지털화된 책 콘텐트를 바탕으로 e-러닝이나 전자책 출판은 분명 확대될 것이다. 또한 포털 사이트의 콘텐트 공급이 활발해지면 수익구조 역시 다양화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이미 그러한 출판기업들이 상당수 등장하여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러므로 책 관련 프로그램을 공중파 방송, 더구나 EBS와 같은 공영방송에서 계속 시행하기란 쉽지 않다. 책은 이제 뼛속까지 상품이다. 그것도 첨단화된 상품이다.
읽을거리가 지식상품의 중심이 되는 동안 우리는 더 자주, 더 많이 쓰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카톡 등 여러 SNS는 읽을거리의 보고인 만큼 수많은 글들이 매일 같이 작성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21세기는 읽기의 시대에서 쓰기의 시대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 과거에 무엇을 쓴다는 것은 권위와 평판을 두루 갖추고 있는 자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래서 작가나 기자, 비평가나 칼럼리스트가 지식과 정보를 독점적으로 생산할 때 대중은 그들의 특권을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지식과 정보를 검색과 복사로 획득할 수 있다. 적절한 편집능력과 요약능력, 혹은 인용만으로도 한 권의 책쯤은 쓸 수 있는 시대다. 출판은 더 이상 글쓰기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정작 필요한 평생교육은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보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가 아닐까. 왜 쓰고 싶은가는 개인의 선택에 맡기자. 그런데 만약 무엇이든 쓰고 싶다면 그것은 더 이상 책상 서랍에 감춘 비밀스런 일기만은 아닐 것이다. 일기조차 SNS에 남기는 시대다. 자본과 권위의 굴레를 벗어나 좋은 글들이 많이 쓰인다면 그만큼 좋은 읽을거리도 늘어날 것이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가 문제다. 다음 개편 때 EBS <책읽어주는 라디오> 대신 <글쓰는 라디오>를 기대할 수 있을까?
글 김우필(문화평론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객원교수, <생각의지평> )
#주석 1) 김유열 EBS 편성기획부장『 텐아시아』(2012년 2월 3일자)와의 인터뷰 중 2) 『 동아일보』1933년 10월 1일자 3) 여론집중도조사위원회, 『여론집중도조사보고서』, 2013, pp.66~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