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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부재와 결핍이 낳은 파국을 치유하는 법

생각의지평 2021. 8. 18. 16:19

커뮤니티 부재와 결핍이 낳은 파국을 치유하는 법

신천지, 사랑제일교회 그리고 옹산

 

한국에서 코로나19가 크게 확산되는 데 두 번의 변곡점이 있었다. 3월에 발생한 대구 신천지 교인들의 집단 감염(5,212531일 기준)8월에 발생한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교인들의 집단 감염(1,16297일 기준)이 그것이다. 9월 초(확진자 22,000여명) 기준 약 28%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수치만으로도 종교는 수치스러운 불명예를 얻었다. 문화와 문명의 중심축이었던 종교가 반지성적 음모론과 야만적 흑색선전의 불쏘시개가 되어 한국 사회를 불태웠다. 사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주류를 구성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끈 대한민국의 중요한 설계자들이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는 교육과 의료를 사회에 전파하고 정착시킨 핵심 주체였다. 안창호와 서북지역 출신 기독 지식인들, 함석헌과 <사상계> 그룹 지식인들은 한국의 정치적, 문화적 근대화를 이끌기도 했다. 이러했던 한국 기독교가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시민사회와 대중에게서 비판과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제 교회는 길거리, 아무렇게나 뒹구는 전단지 속 성인나이트클럽 이름처럼 희화화되고 있다. 그런데 신천지와 사랑제일교회 발 집단 감염의 공통점은 그저 기독교를 조롱하는 사건만을 시사하지 않는다. 이 사건들은 지금 우리 사회의 커뮤니티가 어떻게 해체되고 붕괴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제일교회> 홈페이지 첫 화면

 

장소의 기억을 공유하는 시민적 커뮤니티

커뮤니티는 일반적으로 서로 잘 아는 사람, 즉 가까운 이웃을 사람들끼리 돌보는 장소를 뜻한다. 지역성과 협력을 바탕으로 한 커뮤니티는 근대 시민사회 형성에 기원이 된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커뮤니티가 근대시민국가 건설의 공론장으로서 여론과 매체의 토대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리처드 세넷에 따르면 부르주아의 근간이 된 자유도시민은 중세시대 종교 커뮤니티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서로를 돌봐주는 도덕적 유대를 형성하였다. 종교 커뮤니티 내에서 사회적 불행과 고통을 함께 나눌 때 개인의 창의와 개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알라이다 아스만에 따르면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은 장소를 기반으로 형성된 문화적 기억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처럼 커뮤니티는 장소의 기억을 친밀하게 공유하는 시민적 공동체다. 문제는 지금 여기에 그러한 커뮤니티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지난 수십 년간 과격하게 추진된 급격한 경제적 근대화는 시민적 공동체로서 커뮤니티 형성을 무력화시켰다. 인간은 한곳에 정주할 때 장소에 대한 가치를 느낀다. 머물러 있어야 휴식을 취하고, 주변을 돌보고, 노동에 지친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2년마다 집을 옮겨 다녀야 하고, 대규모 재개발로 동네 골목이 사라지는 공간에서 장소의 가치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느슨하지만 유지되었던 친목 형태의 지역모임조차 디지털 네트워크가 발달하면서 지역 맘카페 같은 온라인 모임으로 흡수되고 있다. 이제 커뮤니티는 장소의 영혼을 기억하는 사진첩 대신 자산의 가치를 따지는 감시탑처럼 변했다. 한국 기독교가 급성장하고 교회 몸집이 커진 것이 이러한 커뮤니티의 변질 혹은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경쟁적 이해관계 없이, 안정된 일상성을 향유하고 싶은 욕구는 정주민의 삶에서 필연적이다. 물리적 장소를 기반으로 일상을 향유하는 커뮤니티에 대한 갈망이 사람들을 바로 교회로 이끈 것이다. 어쩌면 2000년대 이후, 신도시와 도시재개발 지역에서 기독교 계통 교회가 급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리적 공간의 커뮤니티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는 동안 한국 사회는 디지털 사회로 급변하였고, 그 결과 가상 공간의 커뮤니티가 공동체 조직을 점유하였다. 교회는 이제 21세기에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실존적 커뮤니티다.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제하였지만, 교인들이 물리적 공간을 점유한 예배를 포기하지 못한 건, 신앙심이 독실해서가 아니라 모임과 돌봄에 대한 욕구를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교회 목회자가 예배 참석을 강요해도 교인의 자발적 행동 없이 예배를 강행하기란 어렵다. 살갗은 머리보다 단순하지만 솔직하다. ‘카톡유튜브로도 해소되지 않는 소통 욕망은 치명적 바이러스보다 전염력이 강하다.

 

신천지교회 예배 모습

 

사회의식의 세포이자 항체인 실존적 커뮤니티

바이러스가 숙주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살아남으려면 바이러스 공격을 견딜 항체를 가져야 한다. 그러니 선천적으로 항체가 없다면 백신 주사라도 맞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파국은 과학의 부재가 아닌 의식의 부재 때문이다. 유행성 감염병은 코로나19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새로운 감염병이 아니라, 질병 대유행 같은 사회적 파국을 견디고 극복해내는 사회적 항체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다. 어쩌면 사회적 항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물리적이고 실존적인 생활세계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가 그것이다. 커뮤니티는 공동체가 의식을 갖고 일상의 변화와 조건에 대응할 수 있는 주체다. TV 같은 매체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중계하는 재난방송은 화면 속 스펙터클로 느껴지지만,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날아오는 구체적인 재난문자는 신경을 날카롭게 찌른다. 자주 다니던 동네 카페나 식당 이름이라도 재난문자에 박혀 있으면 가족들을 하나하나 신문하게 된다. 위험은 피부가 닿는 공간의 크기만큼 느껴진다. 의식은 결국, 돌멩이가 닿는 물리적 접점 없이 파장을 만들지 못한다. 커뮤니티는 사회의식의 실존이다. 반면 국가는 제도적 장치로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일 뿐이다. 상상력이 실존을 앞설 수는 없다. 국가는 질병 발생 이전과 이후 치료를 관리할 뿐 사태가 벌어지면, 그것을 견디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그리고 개인이 고통을 견딜 때 그것을 견디게끔 돌보는 것이 커뮤니티의 몫이다. 코로나19로 우리는, 사회적 파국을 연대와 협력 없이 해결할 수 없고, 지역과 장소를 기반으로 조직된 커뮤니티가 그것의 첨병이자 세포로서 사회적 항체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안타깝게도 때론 항체가 제 역할을 못 하거나, 암과 같은 비정상 세포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알게 되었다. 반사회적 변이를 일으킨 일부 교회는 그 자체로도 위험하지만, 사회의 정상세포까지 공격하는 암세포로 변했다. 이제 교회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지역성과 일상성을 공유하는, 문화적 공동체로서 대안적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지역노조나 문화센터모임, 정당모임 같은 것이 아니라 장소를 기반으로 친밀감을 느끼며, 연대하고, 지역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해결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의 공동체를 호명할 때가 왔다.

의식이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감각의 자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사회적 항체로서 커뮤니티는 악기연주자들의 합주 모임 같다. 악보가 있어도 서로의 연주 모습과 소리를 눈과 귀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아름다운 연주가 가능하다. 그저 악보만 보고, 자기 파트 연주에만 골몰한다면 실수하지 않는 고독한 연주자일 뿐이다. 타인의 연주를 지각하고 자신의 연주를 그것에 맞추다 보면 누군가의 실수조차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고, 심지어 서로 서로가 공명을 일으켜 악보를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의 연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악보에 명시된 대로만 연주하는 것은 타인과의 교감을 무시한 선험적 행위다. 소통은 단지 필요한 정보만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음마저 즐기고 차이를 차별화할 때 소통은 공명을 일으키는 합주가 된다. 따라서 소통을 바라는 의식이 효율성을 강조하는 코딩처럼 작동될 거라 기대하지 말자. 정보의 오류와 잉여가 소통을 더욱 소통하도록 만드는 힘이 된다. 새로운 커뮤니티는 악보와 같은 도그마나 이념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 악보는 필요하지만 다른 연주자들이 악보보다 더 존중을 받아야 한다.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위험사회에서 일상을 지키는 대안적 커뮤니티

일상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가 마주친 사람들만큼, 아직 보지 못한 누군가도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할 거라는 기대가, 자칫 공허할 수 있는 텅 빈 사회적 관계들을 어떤 믿음들로 채우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나와 관계된 커뮤니티가 다른 커뮤니티와 상생하고 공명할 거란 희망을 낳는다. 배타적이지 않고 소통을 우선시하는 커뮤니티, 서로 존중하고 관계를 중시하는 커뮤니티, 그것이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합주 모임과 같은 대안적 커뮤니티다. 2의 코로나는 계속해서 우리 사회를 위협할 것이다. 그때마다 새로운 공포를 강제적 셧다운 방식으로 차단하다 보면 우리의 일상은 유지될 수 없다. 일상성은 반복과 예측 가능한 사건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질병 확산을 무차별적으로 막는 셧다운 방식은 이러한 일상성을 파괴한다. 그래서 공권력에 의해 셧다운이 시행되었을 때 일상성이 유지되도록 만드는 대응 기제가 필요하다. 대안적 커뮤니티가 이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발견할 수 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사람을 구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오지랖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동백(공효진 분)이 겪는 온갖 불행들은 단지 가난한 부모를 만났고, 무심한 애인을 만났고, 잔인한 연쇄살인범을 만난 불운 탓이지만, 결국 그러한 불운들을 극복한 것은 공동체의 돌봄과 관심 덕분이었다. 불운은 누구에게나 감기처럼 찾아온다. 그리고 감기를 이기는 건 휴식뿐이다. 동백의 깊고 오래된 아픔은 동백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불운한 사건을 겪었을 때 안심하고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없었기에 감기는 낫지 않고 후유증은 심해졌다. 동백이 자신과 아들 필구(김강훈 분)를 버린 애인 강종렬(김지석 분)의 고향 옹산, 미혼모 처지로 음식주점 까멜리아를 연 것은 사람들과 함께하며 생활세계에 정착하기 위해서다.

동백은 이동하는 삶을 멈추고 일상을 엮고자 했다. 멈춰서야 자식을 키우고, 엮어야 자신도 돌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일상을 영위하려면 정주민 의식을 가져야 했다. 쓰레기 배출 하나까지, 가게 전등 하나를 다는 것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가게 건물주 노규태(오정세 분)에게 땅콩 안주 서비스 하나도 허투루 주지 않았다. 건물주와 세입자 간 경제적 계약관계가 실존적 자유를 구속해서는 안 될 일이니까. 결국 동백의 씩씩함은 항구 도시 옹산주민들의 경계를 풀렸고, 그녀 역시 옹산의 명물 게장 골목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이방인의 정주민 의식이 선주민의 편견을 깨뜨린 것이다. 그리고 의식이 서로 공명을 일으키며 기적 같은 일들을 만들어냈다. 연쇄살인범 박흥식(이규성 분)이 동백의 가게에서 그녀에게 살의를 느낄 때, 가게 유선전화와 동백의 무선전화로 쉬지 않고 울려대는 온갖 벨 소리와 문자알림 소리는 흥식의 예민한 청각을 괴롭혔다. 친모(이정은 분)의 신장이식 문제로 심란한 동백을 위로하고 돌보려는 게장 골목 주민들의 오지랖이 기적처럼 흥식의 살인을 막은 것이다. 기적은 신의 영역이지만, 그 신을 불러오는 건 인간의 능력이다. 살인범을 잡고 동백의 마음도 잡은 순경 황용식(강하늘 분)에게 일어난 기적 역시 그러하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옹산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그저 방관하지 않고 참견한 세월이 바로 기적을, 사람들이 부대끼는 시장으로, 골목으로 호출한 것이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처럼 스산한 시대를 의연하게 버티는 사람들에게 위로처럼 화두를 던지고 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옹산 주민들

 

돌봄을 조직하는 커뮤니티의 구심력으로서 오지랖이 필요한 때

불특정 대상에게 벌어진 살인사건과 코로나19 같은 질병 대유행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 드라마에서 연쇄살인범 흥식은 살인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살인은 그저 까불거리는, 나불대는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우연한 사건일 뿐, 그 사건에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유 따윈 없다. 바이러스 역시 이유를 묻지 않고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범인이나 병균이 잡힐 때까지 사람들은 공포에 시달리고 누구나 범죄대상이나 감염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측할 수 없는 공포가 시장과 골목을 휩쓸 때, 그것을 감시하고 막아내고 이겨내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가로등과 CCTV는 범인의 얼굴이나 위치만 확인해줄 뿐 범인을 체포하지 못한다. 공포는 실체를 안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공포의 실체가 실제로 없어지고, 모두가 그 사실을 온전히 믿을 때 비로소 공포는 소멸한다. “옹산의 주민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가 아닌 모두가, 서로를 돌보고, 눈길을 주고, 소리에 집중해야, 촘촘한 그물망이 공포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포위할 수 있다는 것을. 오지랖은 주권을 침해하는 간섭이 아니라, 돌봄을 조직하는 커뮤니티의 구심력이라는 것을.

아직 대안적 커뮤니티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고 작동할지 더 많은 숙고가 필요하다. 대신 이러한 숙고와 관심이 없다면 신천지와 사랑제일교회가 일으킨 파국은 새로운 질병의 유행처럼 계속 반복될 것이다. “까불이란 별명을 지닌 연쇄살인범 흥식에게 용식은 이렇게 말한다. “까불이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고, 계속 나올 거라고.” 하지만 까불이보다 평범하고 정의로운 보통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고. 우리는 어느 쪽인가?

 

글 김우필(문화평론가, 명지대 객원교수, <생각의지평> 편집장)